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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조각. 홀쭉해진 참새처럼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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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조각



산수유나무에 산수유 꽃은 흔적도 없고

비가 내린 탓에 겹벚꽃 나무의 겹벚꽃은

잎처럼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겹벚꽃은

일과 끝의 밤하늘 아래에서

무감한 상태로 마주하는 걸 좋아한다.

컬러 대비의 효과겠지만,

마치 범유진 작가의 소설집

《아홉수 가위》에 실린

〈어둑시니 이끄는 밤〉의

어둑시니처럼 느껴지는 탓이다.

얼마 전에 그 책을 다시 읽었다.

사는 게 좀 갑갑하다 싶을 때

사이다처럼 생각나는 소설집.

만약, 내가 지금 걷는 길이

소설 속 주인공이 옴짝달싹 못 하던

그 동네라면,

나는 끝까지 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스스로를 불신하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과

그런 힘을 만드는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아무래도 환절기에는,

새로운 변화가 절실하다.

더도 덜도 아닌 ‘하나’는

괜찮아지기에 충분하면서

동시에 안 괜찮기에도 충분한 숫자니까.

자신감은 언제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믿음 속에서 단단해지다 마침내,

든든한 철판이 되곤 하니까.

살짝 쌀쌀하지만 걷기 좋은 15도의 날씨.

주변에 알록달록 올라오는 철쭉꽃이 보이니

여름에 조금 가까워진 봄인가 보다.

홀쭉해진 참새처럼 활짝 피어난 나무처럼

새로운 계절 옷을 챙겨 입고

다시 잘살아 봐야겠다.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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