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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인조의 탄생

by 해처럼

19+@해 동안 도쿄에 살고 있다. 서른 초반에 결혼하여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삼인조를 이뤘다. 일본에 착륙한 첫 시점부터 도쿄는 아니었다. 신혼 초에는 치바현의 동쪽 끝에 있는 쵸시라는 바닷가 마을에 살았었다. 2인조로 출발한 신혼집 창문에서는 약 3센티미터 크기의 바다가 보였다. 3센티미터지만 무려 태평양이었다. 도쿄에서 자동차로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작은 소도시였다. 아이의 유치원에서 만나 친해진 일본인 친구는 내가 쵸시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 해변이라고 하면 보통은 뭔가 낭만적이고, 젊은이들이 서핑을 하고,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지나다니는 광경이 떠오르지만, 쵸시는 말이야…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어부가 쓸쓸하게 그물을 던지는 풍경 밖에는 안 떠오른단 말이지.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공기에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항상 떠돌았고 해가 너무 부지런하게 뜨고 져서 조금 늦잠을 잤구나 싶은 날에는 하루가 눈 깜짝할 새에 온데간데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어부와 결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피씨통신 하이텔 하루키 소모임에서 해처럼과 여유롭게라는 아이디로 처음 만났다. 전혀 모르는 타인일 때 각각의 장소에서 하루키를 읽고 마음에 닿아 모임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하루키 씨의 중매로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많고 많은 수억 개의 가능성들의 로드를 걷다가 비슷한 시기에 하루키를 읽었던 것이 만남의 방아쇠가 된 셈이다. 또 이것이 일본에서 신혼을 시작하게 된 단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긴 시간을 여기서 머물게 될지는 몰랐었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가 열여덟 살이 된 이 시점까지 우리는 여기에 있다.



바닷가 소도시의 삶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라면, 바다의 색은 언제나 하늘의 색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맑은 날의 바다는 눈부시게 파랗고, 비 오는 날의 바다는 짙은 회색빛이었다. 바닷가가 적막한 장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름휴가 때 들뜬 마음으로 잠시 놀러 가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도시를 좋아하는 여자가 오랜 기간 머물기에는 그 무력감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교통수단이 애매하여 자동차는커녕 운전면허도 없는 우리 둘은 어딘가에 갈 때 집 앞으로 콜택시를 불러 타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일본어를 거의 한마디도 못하던 나는 편의점이나 슈퍼에 가는 것마저 약간의 공포를 느꼈다. 일본어가 좀 늘까 싶어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을 일본어 버전으로 열심히 섭렵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쓸쓸했고 한국의 가족들이 그리웠다. 한국인이라고는 남편의 회사분들 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외출을 했을 때 우리의 대화를 듣고는 신기하게 바라보는 주민들도 많았다. 게다가 저녁 다섯 시면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고 도시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갓 잡은 생선회는 외로움을 슬쩍 잊을 만큼 맛있었고, 난생처음으로 바다에 뜬 어여쁜 무지개도 만났다. 노을 지는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게다가 우리는 신혼이었다.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만난 건 무지개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인생의 가장 빛나는 존재를 만났고, 우리는 비로소 삼인조가 되었다. 그 바닷가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아이가 태어나던 날, 내가 진통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간호사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원래 한국 산모들이 이렇게 더 아파하는 건지, 개인적인 차이인지 모르겠네요.



후에 그 말을 전해 듣고 어머, 그러면 일본의 임산부들은 덜 아파하는 걸까, 아니면 더 잘 참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유독 고통에 더 민감한 인간인 걸까. 결론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는 진통은 진통대로 다 겪고 나서는 제왕절개수술을 하는 이중의 고통을 맛보았다. 그 겹겹의 고통을 통과해 딸이 태어났고, 아이를 처음 받은 일본 병원의 노련한 간호사 할머니는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활짝 웃으며 말했다.


- 과연 한국인의 얼굴이에요!



양수 속에서 막 빠져나온 바알갛고 조그마한 우리 팀 뉴 멤버의 얼굴을 보며 ‘한국인의 얼굴’이라고 한 그녀의 말에 나는 조금 갸우뚱했다. 그러다 다른 일본 아가들의 얼굴을 보니 역시 조금 다르구나 싶었다. 딱히 뭐라 형용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다르긴 달랐다. 미묘하게 얼굴의 분위기와 빛깔과 농도에 차이가 있었다고 할까? 그리고 그 ‘미묘함’은 우리가 이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오면서 항상 감지할 수 있는 그런 차이였다.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르다,라는 것이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며 묘사할 수 있는 꽤 적절한 문장임을 그때는 아직 몰랐었다.



아이가 품에 오기 전까지 나는 향수병과 우울감, 불면증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들을 주렁주렁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그 모든 것이 청소기로 빨아들인 양 말끔하게 사라지는 걸 경험했다. 그 조그만 생명이 갖고 있는 파워가 엄청났다. 인류에게 모성애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꼬물꼬물한 어린 사람이 나를 향해 발산하는 그 감정 역시 모성애에 비할만한 사랑이라는 걸 아이를 낳고서야 알았다. 그로 인해 마음이 온통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그 작은 바닷가 마을은 내게 첫 일본생활의 시작점, 결혼생활의 시작점, 엄마로서의 시작점이자 아이 인생의 첫 시작점이 되었다. ‘시작’이라는 공통분모로 인생 전반의 크나큰 변화가 펼쳐진 곳이었다. ‘첫’이라는 말이 접두어로 붙는 모든 사건의 의미는 그 농도가 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굵고 진한 존재감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첫 만남, 첫아이, 그리고 첫 무지개 같은 것들 말이다. 아무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던 그 무지개가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날 정도다. 내게 많은 ‘처음’을 보여준 그 바닷가 마을은 그러한 의미로 남아있다. 나와 남편과 아이의 생이 촘촘하게 얽히며 새로운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한 곳으로써.



아이의 백일이 조금 지났을 때 우리는 바닷가 생활을 마무리하고 도쿄로 이사했다. 이사하던 날 자주 이용하곤 하던 택시 회사 앞을 지나는데 대개 희끗희끗한 은발신사였던 운전사 분들 모두가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리 세 사람을 이은 선들이 모여 하나의 긴밀한 정삼각형을 만들어냈고, 우리는 낯선 도시 도쿄 위에서 새로운 챕터를 써가기 시작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집에 가서 가족을 사랑하세요.

- 마더 테레사,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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