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는 싫어하는 것들을 한 무더기 껴안고 무거운 걸음을 터벅터벅 내딛는 인간이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방송 프로그램은 저래서 싫고, 저런 말투는 도무지 견딜 수 없고, 저 음식점은 맛이 없어서 싫고, 이 가게는 불친절해서 싫고… 실로 다양한 이유들로 타인과 물건과 장소와 상태들에 대해 불만과 거부감을 끌어안고 있었다.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어떤 특정한 상황과 상황들이 싫었다. 거침없이 싫음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성격이라 들키지 않고 모든 것들과 표면적으로는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는 있었다, 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 거라는 의심이 든다.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생명체가 과연 있을까?
대체 왜 그렇게 싫어하는 것이 많았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겨우 알 것 같다. 내가 지나치게 '심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심지가 약해서 그 상황이나 사람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그들보다 강해 지거나, 그것들을 미워하거나의 두 가지뿐이었고 결론은 늘 후자였다. 그 밖의 다른 방법이라고는 아예 생각해내지도 못했다.
겉으로 아무리 유약해 보여도 마음이 강한 사람은 무언가를 쉽게 미워하지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익명으로 쏟아놓는 사람들은 대개 한없이 약한 사람들이다. 싫어하는 그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숨어서 쏟아놓는 사람들은 실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같은 일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조그만 결심을 했다. '싫어하는 것들을 천천히 하나씩 바닥에 내려놓아 보자. 좋아하게 되는 것까지는 무리일지라도 그것이 싫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나 보자'라고.
바닥에 내려놓기까지의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단 그 마음들이 바닥에 닿았다는 것을 확인하면 그것을 다시 주워 들고 싶은 마음이 신기하게도 생기지 않는다. 내려놓은 그것들을 그대로 둔 채 나는 그곳을 빠져나간다. 그러고 나면 상황 종료.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가 매일 밤 작은 망치를 가지고 감옥의 벽을 조금씩 긁어내 다음 날 몰래 그것들을 운동장에 버리는 방식과 비슷하다. 그런 식으로 실로 여러 종류의 상대와 물건과 상황들을 향한 싫은 감정들을 버렸다. 그러자 조금씩 어깨가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만큼 가볍게 걷는 인간이 되었다. 동시에 이전보다 조금 더 내면에 힘이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타인을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는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싫은 감정, 자기혐오를 버리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자기혐오는 피부와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어 그것을 떼어 버리려면 피 흘릴 만큼의 아픔을 감수하는 각오가 필요하다. 게다가 어렵게 바닥에 내려놓는다 해도 그것을 두고 돌아서는 것 또한 엄청난 결심을 요한다. 그러니 이 경우에는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내가 시도했던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는 자신을 주관적 관점이 아닌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단 그 객관화는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따뜻한 온도를 가진 것이어야만 한다. 조건 없이 내게 사랑을 주는 부모님, 나를 깊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이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나의 결점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키우고 있는 애완동물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도 괜찮다. 그 녀석은 내 머리에 뿔이 났건, 가진 것이 많건 적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니까. 내가 문득 미워질 때 그 감정을 약간 멀찍이 떨어뜨린 후 사랑하는 이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것. 이것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적어도 나라는 존재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을 차츰 느끼게 되었다.
사랑으로 바라봐주는 그 눈빛이 우리의 기억 속에 단 한 명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은, 그러므로 행운이다. 행운은 네 잎 클로버 같은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그때 그 눈빛의 기억 속에 있다. 그것만이 내 안에 쌓인 감정의 무거움을 덜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