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자인 신드롬

서울

by 오주황



오진우는 오랜만에 옷을 차려입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전 회사의 후배가 퇴사를 했다는 연락이 왔다. 김 대표의 여전한 태도와 대우가 좋지 않다는 게 이유라고 전해왔다. 팀장은 지금도 대표들의 저격을 한 몸으로 막고 있다고 후배는 말했다. 합정역 근처 작은 가게에서 약속이 잡혔다. 오진우는 후배에게 퇴사를 종용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퇴사가 유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진우는 마음이 맞는 동료가 있는 곳이라면 유행을 따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할리스 뒤 쪽에서 후배가 올라온다.


형!

배고프다.

아래쪽에 우동 맛있는 집 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늘은 안 될 것 같고 저쪽에 제육 먹으러 가요.

좀 살이 빠진 것 같은데. 후배의 얼굴을 본 오진우가 말한다.


후배는 팀장이 퇴사 후 바로 연락이 왔다면서 이직할 회사를 소개해 줬다고 말한다. 오진우는 팀장이 이직을 제안한 전화가 자신에게도 왔다는 말은 후배에게 하지 않는다. 후배는 결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무래도 급여를 못 받을 것 같다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겠다고 오진우에게 말한다.


직원들은 다 퇴사하고 과장님 한 사람 남았어요. 근데 육아휴직으로 이제 출근 안 하신대요.

… 업무를 네가 다 감당할 수 있어? 오진우가 후배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저한테 인수인계 다 하셨어요. 급한 일이 생기면 전화해도 된다는 말 남기고 가셨는데 어제 일처리를 저 혼자 못해서 결국 과장님이 나오셨어요.

대표는 뭐라고 하는데?

면담하면 직원 채용 중이라고 걱정 말라고만 해요.

… 채용 중인 것 같아?

출근하고 일주일 즈음돼서 협력업체들한테 독촉 전화하고 내역서 팩스로 왔었어요. 아무래도 채용할 여력은 없는 것 같아요. 어제는 팀장님한테 전화하니까 대표님과 오랜 인연이라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오진우는 그만두라는 것 말고는 다른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직원들이 이미 나갔고 독촉장이 들어오는 거면 자금이 돌지 않은지 꽤 되어가는 듯했다. 노동부에 신고해봐야 받지 못할 것이 뻔했다. 오진우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팀장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진우는 후배에게 내일 회사에 출근해서 급여 관련해서 대표와 마무리를 잘 짓고 업무 진행했던 증거 자료를 모아서 신고할 수 있으면 하라고 말한다.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업계에서 급여를 밀리는 회사의 대표가 이름을 바꿔서 다시 사무실을 연다는 이야기를 건너 듣긴 했지만 오진우가 가까이에서 경험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위로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밥을 같이 먹고 후배의 말을 듣고만 있다.


형, 공채 준비할까 생각 중이에요. 요즘 중고 신입도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가서 준비 많이 한대요.

공기업도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던데. 오진우가 담담하게 대답한다.

2년 정도면 거의 결정 난다고 하더라고요. 더 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지. 종로에서 학원을 알아본다는 후배가 말한다.

좋은 회사가 있다는 말은 많은데 내가 보는 건 왜 이건 것들밖에 없는지 좀 회의감이 들어. 허탈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오진우가 말했다.

이제는 생계유지만 되면 좋겠어요. 3년 차 넘어가도 작은 회사 월급 받아서는 월세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요. 집세, 교통비, 통신비 기본적인 것 빼고 남는 게 없어요. 집에 내려가는 것도 못하겠고…

……


후배가 시험 준비를 하겠다는 말에 오진우는 별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공채도 바늘구멍이라 1명 채용되는 것보다 99명이 채용되지 않는 것이 더 신경 쓰였지만 회사에 남아 있는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오진우가 그랬다. 회사에 귀속되는 사람으로는 이제 내일을 계획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공기업은 중소기업보다는 더 기회가 많았다. 급여가 올라가면 좋은 조건의 대출을 할 수 있고 그러면 월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그래도 오진우는 중소기업 중에서 후배가 가면 적응할 수 있을 만한 회사를 소개했다. 10명 정도 되는 회사로 진행하는 일들에 의미가 있고 젊은 대표가 운영하는 곳이라서 이전 회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상시 채용하는 곳이 아니라서 준비를 잘하라고 알려준다. 사실 후배의 사정을 들어주는 것 말고는 오진우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른 세상이 올 것이라고 눈을 감고 기다리는 것은 달콤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기대할 수 없는 것을 상상으로 기다리면서 잠에 드는 것을 그만하고 싶다고 오진우는 생각한다.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멈춰 선 주체가 되면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오진우는 돌아오는 길에 계절을 느껴본 마지막이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소풍을 기다렸던 때였던가. 어린 나뭇잎이 새롭게 나올 때, 연한 초록색이 모여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볼 때 느껴지는 것이 있다. 일일이 펼쳐 놓고 정리한 것은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서 선명해지고 있다. 퇴사한 회사에 대한 생각은 줄고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고 싶은지가 남았다. 오진우는 충족될지 모르겠지만 선을 야금야금 넘어오는 상사의 무례에는 단호하게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에 닿는다. 회사라는 조직에 대한 회의감은 시간이 갈수록 짙어진다. 변하지 않는 조직은 변화를 주저하는 사람들보다 더 일찍 사라질 것이라고 오진우는 새로운 초록 잎을 보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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