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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주황 Sep 08. 2021

빨간 얼굴

봄, 가을



이지수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이었다. 교양으로 선택했던 기초 독일어 수업에서 한 사람씩 교수가 지목하는 숫자를 독일어로 읽었다. 이지수의 차례가 되어서 말하려는데 머릿속에서 맴도는 첸 츠바이… 가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이지수의 얼굴은 빨개졌고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순간 따끔거렸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손에난 땀을 닦으면서도 머리가 하얗게 질려있었다. 손자국이 난 페이지를 덮고 작은 강의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대리석 된  차가운 창 난간에 손이 닿았을 때가 이따금씩 기억이 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언제부터 인가 곤두서 있었던 감각들이 무뎌지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차츰 사라져 갔다. 높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성적은 대학의 이름만큼이나 영향력이 있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알만한 규모 있는 회사에 들어갔고 주변 어른들은 수고했다고 이지수를 격려했다.

어떤 것을 포기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간절함이었던가. 입학  한동안 이지수는 혼자를 고집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지수의  세계는 작았지만  작아지고 있다고 느꼈고  안에   없이 튀기는 공의 속도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누구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잘못을 하고 있는 느낌을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이지수는  세계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런 세계가 자신에게도 있었는지 천천히 잊어갔다.


이지수가 바쁜 시간만 지나면 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들어와서 이지수를 빤히 내려다본다. 뒤늦게 들어온 다른 사람은 쓰레기통 주변을 어슬렁 거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기도 전에 아래로 이지수를 응시하던 사람이 손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여기에 새로 일하러 온 사람이 있다는데 그 사람 맞아요?

네. 제가

혹시 여기 쓰레기 치웠어요?

아, 제가 분리수거를 했어요.

야! 네가 뭔데 쓰레기를 치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네가 뭔데 쓰레기를 치우냐고. 처음 온 사람이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지. 누가 쓰레기를 치우라고 했어!

네? 쓰레기가 쌓여있어서 분리수거를…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닌데 왜 그걸 하느냐고.

청소 아주머니에게 도움이

아니!! 말이 안 통하네 그런 일은 하지 말라고! 쓰레기통 치우는 일은. 시키면 시키는 일만 하면 되지 새로 온 사람이 제멋대로 아무 일이나 누가 하라고 했어!


이지수는 당황해서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와 한 마디도 거들지 않던 여자 둘은 그렇게 할 말만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컨테이너를 빠져나간다.


이지수는 조용한 컨테이너 안의 공기가 그날의 침묵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일부터 십까지의 숫자를 독일어로 말하는 시간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숫자들이 떠오른다. 이지수는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나가면서도 분이 안 풀렸는지 허공에 대고 큰소리로 뭐라고 말한다.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이렇게 화가 날 일인지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해하기보다 먼저 얼굴이 빨개져 있는 것을 이지수는 느꼈다. 컨테이너의 창 쪽으로 걸어가 이지수는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길 기다릴 뿐 달리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다. 언제 들어왔는지 김윤경은 체온계를 들고 일 할 준비를 한다. 이번에도 김윤경은 다른 일과는 다르게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이지수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학교로 들어오는 차들을 멈추고 창문을 내리게 하고 체온을 채고 코로나 관련된 문진을 하는데 열중한다.


이지수는 창문 끝에 걸려 있는 나무를 보면서 오래전에 열등감에 빠져 있지 않았다면 뭘 할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의 말이, 무엇인가를 다시 상기시켰다. 대학 입학 시절의 자신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쓰레기가 쌓여가서 분리수거를 한 것뿐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와서 그 일로 자신을 매우 심하게 몰아세운다고 해서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이지수는 얼굴이 붉어진 자신이 부끄러웠고, 아무 대거리도 하지 못한 것이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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