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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윤 Sep 20. 2023

요즘 하는 단상 (斷想)

제 잡생각… 구경하실래요?

#1. 반복까지가 시도다.


요사이 익숙하지 않은 길로 출근을 해봤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출근하는 길은 처음이다 보니 내비게이션에 나오는 길 안내조차 생소하다. 며칠을 실험을 하듯 이 방법 저 방법을 시도해 본다. 어떤 길이 빠른지, 어느 때 막히는지, 어떤 길이 편안한지 직접 가보면서 파악한다. 그리고 그 길을 반복해서 가본다. 그럴 때 디테일이 정리된다. 미리 어느 구간을 지나면서부터 차선을 옮겨야 하는지 알게 되고, 내비게이션이 아무리 막히지 않은 길이라고 다른 길로 안내해 주더라도 꿋꿋하게 그 길을 고집해야 나중이 편하다는 것도 안다. 반복은 익숙함을 만들고 결국 그것이 내 것처럼 편안해진다.


문득 깨달았다. 시도는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 그 이유는 생각과 실제는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좋았거나, 생각보다 쉬웠거나, 생각보다 보람되었거나. 또 시도를 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은 많은 배움들이 생겨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떤 대처를 해야 하는지, 마음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어떤 기쁨이 피어나는지, 어떤 것에 약한지 강한지. 시도 속에서 많은 틀이 깨진다.


그리고 그 시도는 반복을 했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한 번의 시도는 해프닝과 같은 것이다. 우연한 사건이다. 그래서 힘이 없다. 하지만 반복 속에서 시도는 어떤 흐름과 실체를 만든다. 반복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지고 완성도가 생기며 한 번의 시도로는 몰랐던 면들을 만나고 조정한다. 단단해진다. 단단해지면 실체를 가진 흐름이 되고 힘이 생긴다. 그래서 진정한 시도란, 반복까지를 포함한다.






#2. 맑고 깨끗한, 선명한 욕망


최근 소위 이루고 산다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10년이 지나 바라던 것들을 이렇게 이루게 될지 몰랐어요."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봤다.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의도가 깨끗하고 선명하다. 아주 단순할 정도로. '저것을 갖는다, 혹은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어떤 의도의 생각이든 그것은 선명한 빛으로 한 지점을 가리킨다. 흐리멍덩한 면이 없고, 이것저것 다 갖고 싶어서 정신없지 않으며, 바뀌지도 않는다.


두 번째, 방향과 의도가 선명하기 때문에 꾸준하다. 오늘은 이랬다가 5년 뒤에는 바뀌었다가 하지 않는다. 꾸준하기 때문에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10년이 걸렸다는 사람도 있고, 그 이상 걸렸다는 사람이 있고, 5년 안에 이룬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의도를 꾸준히 유지한다는 것.


세 번째, 의도가 있다고 그것만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충실히 살고, 오늘을 살고, 지금을 살아간다. 왜 아직도 이루지 못했지?라는 생각을 하더라도, 간혹 절망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인생의 균형을 잡는다.


과정도 풍요롭게 만들면서 의도를 향해 걸어간다. 왜냐하면 장기 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삶을 방해하는 의도는 의도가 아니다. 하루는 이렇게 살아도 이 짓을 10년은 못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의도는 삶을 파괴하는 빌런이지 희망이 아니다.


'시간이 걸린다. 때를 기다린다.'


모두가 다 알지만 진정으로 이것을 알고 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관찰한 사람들에게는 당장 되지 않는다고 채권자가 부채를 챙기듯 삶을 닦달하는 자세가 없었다. 언젠가 삶이 당연히 줄 것을 신뢰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이쯤 되면 욕망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루는 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갖고 선택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기에 욕심처럼 보이지 않는다. 욕심과 욕망은 의도에서 무엇인가 넘쳐서 과해진 것이다. 조급함이 과해지든, 간절함이 과해지든. 그래서 의도의 관철을 위해 자기 성찰이 다시 필요해진다. 또 진정한 자신의 욕망인지 살피고 점검한다. 지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깨끗하고 선명한 의도를 유지한다. 반복이 중요한 이유다.






#3. 표현한다는 기본권


수영이 끝나고 샤워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옆에 엄마와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엄마가 등장해 이건 이렇게 하면 다친다고 말한다. 수영을 하는 내내 엄마가 지켜봤는지 네가 수영을 할 때 이렇게 하면 어떻고, 저렇게 하면 어떤지 엄마는 한참을 조언한다.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아이가 엄마가 그렇게 말해서 수영을 하다가 나오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엄마가 마치 너에게는 충분한 자유가 있는데 왜 그랬냐는 듯이, 그럴 때는 엄마를 불러서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된다고 말한다. 아이의 입이 조금씩 튀어나온다.


미묘한 신경전이 있는 것 같아서 옆에서 눈치를 보며 계속 관찰했다. 아이가 뭘 집어 들면 더 좋은 것을 가져다준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하려고 했던 걸 그만두고 흥미를 잃는다. 결국 이것저것 만지다 드라이기를 집어든다. 엄마가 뺏어 들고 집에 가서 다이슨으로 말리자고 한다. 이건 머리카락이 안으로 들어가 위험하다고 말한다. 모두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쯤 되니 아이는 입을 꾹 다문다. 말을 하지 않는다. 엄마는 또또 이런다고 아이를 달래고 왜 그러냐고 한다. 아이가 변덕을 부리고 생떼를 부린다고 여기는 것이다.


옆에서 한참 그 대화를 듣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변덕을 부리는 것도 생떼를 부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모든 안전한 방법들이 자신을 묶어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정해진 것만 해라. 아이는 가장 안전한 수영만 하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했다. 표현하지 못한 자아는 슬프고, 분노하는 법이다.


문득 만약 우리에게 변덕스러운 생각, 마음을 제외하고도 진정한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진정한 자아라는 것이 내 안의 깊은 곳에 있다면, 그 자아는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드러내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은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하다. 세상에 100% 나와 똑같이 생기고 생각마저 똑같이 하는 사람은 없다. 자연의 무한한 변수는 100%를 허용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다양하다. 거스를 수 없는 고정불변의 진리는 변한다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철학적 논거를 제외하고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 같다.


독특한 모양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의 영혼은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을 표현할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 표현 방식이 음악이든, 글이든, 아니면 가드닝이든, 뜨개질을 하든, 춤을 추든 상관없다.


당신의 영혼이 춤추게 두어라. 영혼에게 안전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이런 것은 좋지 않다.' 이런 것들은 영혼이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 참고할 정보이지 절대적 법칙은 아니다. 그것을 알고 다른 대안을 찾든 영혼은 알아서 온당한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안전함이 족쇄가 되면 영혼은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과 두려움을 가진채, 이 독특한 개성을 가진 아름다운 자아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고, 세상이 말하는 안전하고 좋은 길을 따르기 위해 사회적 자아가 나와 억지 춤을 추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그대로, 영혼이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 밖에 없다. 나 스스로에게 가장 큰 사랑과 다정함을 베풀어야 한다. 자신의 진정한 내면이 세상의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족쇄를 풀고 들판으로 나와 두려움 없이 춤을 추게 할 수 있도록. 진정한 자아실현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오늘 나의 영혼에게 표현할 자유를 줘본다. 나와서 춤을 추어라. 내가 너의 진정한 부모처럼 지켜주고 바라봐 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 오직 나만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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