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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정윤 Sep 26. 2023

시금치를 심어봤습니다.

똥손에서 자라는 새싹

올해 늦가을에는 직접 기른 시금치를 먹어보겠다는 일념으로 2주 전부터 밭을 재정비했다. 72시간 단식에 도전해 공복 상태였음에도 호미를 들고 텃밭에 난 모든 잡초를 뽑았더랬다.


잡초를 뽑고 또 뽑는 동안 애플워치가 오늘의 활동량 목표를 달성했다며 2번을 울렸다. 1시간 동안 달리기한 수준의 소비 칼로리가 나오다니.. 노동이란 대단했다. 3시간 동안의 노동 끝에 깨끗해진 밭을 보는 뿌듯한 기분이란. 별 것도 아닌 일에 성취감이 인다. 


시금치는 날씨가 쌀쌀해져야 잘 자라는 식물이라기에 2주 정도 좀 더 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이번주에 비료를 섞어 밭을 갈았다. 


어떤 비료는 2-3주 전에 뿌려놓고 기다려야 하는데 내가 구매한 비료는 가스가 나오지 않아서 뿌리고 바로 심을 수 있다고 종묘사에서 말했다. (종묘사라니..! 생소한 단어가 기껍다. 별 것도 아닌 변화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일상이 경탄의 연속인 것처럼 새롭고 즐겁게.) 여하튼, 그런 이유로 이번주에 비료를 뿌리고 흙이 골고루 섞이도록 호미질을 했다. 


농사를 한다는 것은 의외로 화학 공부의 연속이다. 땅의 성분, 비료의 성분 모두 중고등학교 때 배운 화학과 관련이 있었다. 땅의 산성도를 체크하고 비료의 성분을 체크하고. 적어도 화학과 석사 정도는 나와야 농사도 잘하는 거 아닌가 싶다.


하지만 졸지 않는다. 모든 것은 알아가고 배워가고, 관계 맺는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법. 흙과 나무와 자연과 관계를 맺어가듯 천천히 알아가면 될 일이다. 땅이 비옥해야 나무가 잘 자라듯이 식물과 땅의 성향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기울이면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식물이 무엇을 좋아하고, 흙이란 무엇인지. 


시금치를 심기 위해 열혈 시청한 유튜브에서 어떤 텃밭 농부가 그런 말을 했다. 1년 농사를 짓는 흙을 소중히 하라고. 흙이 만들어지기까지 적게는 400년 많게는 2,000년도 넘게 걸린다고 했다. 흙이 쓸데없이 물에 유실되지 않게 하고 흙에 좋지 않은 유기물이 섞이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면서 해준 말이다. 


한 줌의 흙을 소중히 하라니. 흙을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흙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썩는 것은 뭐든 흙에 묻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작물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 도움이 되는 유기물이 따로 있다니. 농부가 가지는 지식이 신비롭다.


쓸데없는 이야기이지만 나에게는 농부 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20대 시절에 나는 농부의 삶을 부러워했다. 물론 치기 어린 생각에 타인의 삶을 부러워한 것이다. 이유는 엄마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일이 참 많았다. 없는 실력 탓인지 구조 탓인지 알 수 없지만 항상 일이 차고 넘쳐 새벽 3-4시가 되어서야 퇴근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주말에도 밤 9시, 10시까지 회사에 있기 일쑤였다.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딸자식이 매일 같이 새벽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전화만 받으면 회사라고 하니 갑자기 화가 나셨나 보다. 사장을 바꾸라며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치며 말씀하셨다.


"농부도 해가 지면 곡괭이를 놓는다!! 지금이 어? 몇 시야?! 네가 어디 노예로 팔려가도 지금이면 자고 있겠다!!"


노예로 팔려가도 이 보단 일이 적을 거라니.. 웃퍼서 피식피식 기운 없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그 말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고 급기야 농부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자연의 리듬에 맞춰 일을 하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세미 농부(?)가 된 지금에서 해보니 나름 행복하다. 하지만 많은 부수적인 조건들이 있었기에 행복함을 아는 것이 가능했다. 세월이 흘러 마음의 모난 부분들이 많이 깎였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변화했으며,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철학이 쌓였고, 불안과 방황이 자연스럽게 물러나고 그 자리에 안정과 깊이가 생겨서 이런 삶이 소중함을 알았다. 허투루 주어지는 것은 없었다. 


각설하고 똥손을 가진 농부로 돌아온다. 첫 시금치를 심는 날, 씨를 뿌리고 흙을 덮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심 반, 호기심 반 많은 마음이 일어난다. 내 손으로 꾸민 것에도 생명이 자랄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미지수다. 하지만 생각한 바를 하나씩 이루고, 해보지 않았던 것을 작게라도 도전하는 지금 이 순간, 그 자체가 즐겁다. 


2023년 똥손이 심는 시금치에도 새싹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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