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나는, 충분히 사랑한 것들은 스스로 떠나가게 된다고 믿는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차 없이 쳐내고 모질게 잘라내지 않아도 된다. 내 안의 부정적인 부분을 바라봐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고 공감하면 그들은 어느 순간 길 떠날 채비를 한다. -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중에서 (박미라 저)
떠나보낼 때가 온 것 같다. 오랜 기간 나의 삶을 이루었고 나의 삶의 색깔을 입혀왔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사랑을 담아 아빠라는 표현으로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은 머리가 아닌 가슴과 손이 쓰는 글이 되길 바라며,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 들지 쓰는 순간에도 잘 모르겠다. 두서가 없을지라도 매 순간 진실하길.
올해는 그런 해였다. 나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 많았다. 많은 이들의 다정함에 가슴이 따뜻했으며 나 스스로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그래, 올해 나는 꽤 대단했다. 나는 나에게 참 충실했다. 마음을 닫지 않고 열려고 노력했고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말이지 나는 올해 좀 대단했던 것 같다. 나에 대한 많은 이해가 생기면서 어린 시절의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많은 습관, 마음의 작용들이 깊이 들여다보면 살아왔던 나의 배경, 즉 내 어린 시절과 맞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모든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과거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고 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인격체로 살아온 척 해도 잊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또한 부모의 그늘에서 아주 일찍 독립해 어엿한 성인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사람들의 삶의 과정은 어린 시절에 부모와 형제, 친구, 사회가 남긴 마음의 어떤 것을 소화해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그것을 상처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 상처마저 나를 구성하는 일부이며 그 상처들이 모든 이에게 고유한 색깔과 향기를 남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의 뿌리를 만들고 내 삶의 배경이 되어 주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깊이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29살이 되던 겨울에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29살이 되던 겨울에 돌아가셨다. 10년 전 이야기다. 간경화가 간암으로 진행되었고, 예전부터도 계속 시한부 선고를 받아왔지만 그래도 꽤 오래 우리 곁에서 삶을 이어가셨다. 어느 날, 검진을 받아봐야겠다고 엄마와 함께 외출을 하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그렇게 전남대 병원에서 순천 성가롤로병원 호스피스 병동까지 옮기는데 채 몇 달이 되지 않았다. 아빠가 어떤 치료도 없이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간다는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했으니 순천으로 내려오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오랜 야근으로 피곤한 상태였다.
호스피스 병동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고요한 얼굴로 앉아계셨다. 나는 아빠가 아파 보이지 않아서 안도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 다시 일어나실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아빠는 2주 정도 살아 계시다 돌아가셨다. 그 기간 나는 아빠의 옆에 있었다. 처음에는 멀쩡하게 오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어느 순간 걷지 못하셨고, 또 어느 순간에는 상체가 움직이지 않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머리도 움직이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눈동자도 움직이지 못할 때 아빠는 마지막 한숨을 쉬듯 숨을 쉬고 돌아가셨다.
아빠의 마지막은 고요했다. 어느 날은 아빠가 말려도 말려도 일어나려고 하셨었다. 일어나지도 못하던 시기였는데 넘어지면서까지 일어나려고 했다. 엄마는 이 양반이 왜 이러냐며 한숨을 쉬며 말렸다. 마지막까지도 곤조를 부린다고 화를 냈다. 아빠는 저리 비키라는 손짓을 하며 결국 기어서라도 어딘가를 향했는데 그곳은 화장실이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대소변을 본다. 아빠는 삶의 마지막까지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날 성가롤로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시는 신부님이 나에게 말해줬다. 사람은 마지막엔 이성이 아닌 자신의 습관대로 산다고. 아버지의 삶이 어떻든 어쩌면 이것이 당신의 아버지의 본모습일 거라고. 고요하고 좋으신 분이었을 거라는 말을 남겨줬다.
그날 내가 느꼈던 감정은 뭐였을까. 알 수 없는 슬픔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빠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 살아왔을까. 너무도 많은 감정들이 쌓여 있어 나는 처음으로 날 것 그대로의 아빠를 마주 본 느낌이었다. 올 가을 같이 도토리를 주우러 가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 기억 속의 아빠와 진짜 한 인간으로서의 그는 다른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서로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봐주고 살아왔을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아빠는 지금 생각해보니 방황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늦은 밤 엄마가 아빠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내가 초등학생 때였는지 중학생 때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아무래도 그 인간이 어딘가에서 술을 먹고 있을 테니 데리고 오라고 했었다. 나는 밤길이 무섭고 싫어 투덜거리며 어두워진 거리를 달렸다. 어둠이 무서워서였다. 달리다가 아빠 차를 보고 멈췄는데 아빠는 울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목놓아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창피했던 것 같다. 이 밤 중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아빠라는 사실이 창피했다. 그리고 한심했다. 엄마 말이 맞다. 아빠는 맨날 술만 먹고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마음 한편이 뭔가 시렸다. 뭐가 저렇게 사람을 서럽게 만들 수 있을까. 무엇이 당신의 가슴에 이토록 아프게 남아 있는 걸까. 그래서 이 기억은 아주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우리 아빠는 좋은 아빠는 아니었다. 부부싸움도 잦아서 나는 어린 시절 항상 불안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큰 소리가 날지 불안했고 밤이 오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엄마랑 아빠가 싸울 때면 오빠랑 나는 옥상으로 피신했다. 그나마 옥상으로 피신한 날은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다. 싸움이 격해지면 어린 몸으로라도 말려야 했으므로. 그 몫은 오빠가 했다. 나는 어렸고 무력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러다 엄마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아빠가 그만 화냈으면 했다.
아빠는 쉬는 날이면 매일 술이었고 가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이야기들을. 그리고 술을 안 드실 때에는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아빠의 모습이 좋았다. 동양화를 그렸는데 얼마나 잘 그렸는지 전시회도 열었고 가끔 집에서도 그렸다. 그런 날은 너무 좋았다. 술을 안 마시면 아빠가 좋았다. 초등학생 때 아빠가 술을 안 마시는 날 벼루와 먹을 꺼내 들고 나보고 먹을 갈라고 하면 그게 기뻤던 것 같다. 옹송그리며 앉아서 먹을 갈면 아빠가 말해줬다. ‘먹은 똑바로 세우고 힘을 균형 있게 주면서 갈아야 한다’고. 먹이 다 갈리면 붓으로 쓱쓱 멋들어진 그림을 그렸다. 유치원 때에는 내가 읽던 동화책에 나오는 신데렐라를 붓으로 그려줬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좋았던 기억도 초등학생 때까지다. 내가 사춘기가 오면서부터는 아빠의 그림 재주마저 기벽처럼 느껴졌다.
엄마와 동네 사람들은 자주 아빠 욕을 했다. 사람은 똑똑한데 고집스럽다고도 했고, 성질이 더럽다고도 했다. 내 생각에도 아빠는 차가웠고 다정하지 않았으므로 나 또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재주는 많지만 성격은 더러운 사람.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병도 온 거라고 생각했다. 먹지 말라던 술담배를 그렇게 하니 안 아플 수가 없다고 그것 모두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그런 아빠가 다르게 보였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대학을 가고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질풍노도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며 그 안에서 살아남았고 매일 우당탕탕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는 집안에서 공부를 해서 서울로 대학을 왔다. 그 모든 것들이 혼자 떨어져 시간도 많은 젊은 시절의 나에게 생각으로 덮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때 나는 내가 왜 우울한지, 왜 내 20대는 꽃 같지 않고 회색빛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돌보지 않는 마음이란 한 여름 태풍보다 더 거친 폭풍우가 되어 나타나는 법이니까.
우울함은 고립감을 동반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많은 심리학 책도 말해준다. 그때 나는 그런 느낌을 동일하게 받았다. 우울할 이유도 하나 없는데 왜 바보 멍청이같이 매일 이렇게 살아가는지 스스로가 밉고 싫었다. 어느 날은 알 수도 없는 눈물이 흘러서 강의를 듣지 못했고 우울함은 몸을 상하게 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식은땀이 흘렀다. 그날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미 간경화 판정을 받아 몇 년 못 사신다고 했던 아빠였다. 목소리가 울고 있으니 아빠는 나에게 물었다.
“왜 울고 있어?”
그때까지도 아빠는 내 인생에서 이해 못 할 사람이었다.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미웠다. 하지만 왜 울고 있냐는 말 한마디에 이상하게 눈물이 더 흘렀다. 어린 시절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모르겠어요. 하루 종일 눈물이 나요.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도 모르겠어요. 하루 24시간 가슴이 두근거려요. 그냥 미칠 것 같아요.”
아빠가 무슨 말을 해줄지 나는 예측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아빠가 이럴 때 어떻게 해주는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화낼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당연한 수순으로 우리는 말싸움을 이어가겠지.
“그럴 수도 있다. 그런 때도 있는 거야. 사람이 살다 보면. 이상한 게 아니야. 너무 힘들면 병원을 가봐라”
처음으로 나는 전화를 끊고 목놓아 울었다. 그때 나는 아무에게도 나의 마음의 병을 이해받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왜 그러냐고 물었고 밝게 살라고 조언해 줬고 운동도 하고 친구들과 즐거운 일을 하다 보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노력하면 될 일을 혼자 끙끙 앓고 있다고도 했다. 그것 하나 극복하지 못한다고 대놓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우울하다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밝게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더 진창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를 아빠는 괜찮다고 말해줬다.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모두 당연하게 하는 말들을 하지 않는 아빠. 처음으로 어쩌면 아빠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여린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어린 시절부터 내가 그토록 원하던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누구보다 든든하고 믿어주는 따뜻한 산과 같은 사랑을.
하지만 여기까지는 아빠에 대한 내 기억 속의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아빠를 이해하고 싶지만 나는 아빠와 그렇게 진솔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고 내가 이해하기 위해 추정하는 것들 뿐이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건 오직 내 내면뿐이다. 요가와 명상을 하며 매번 새롭게 이해하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나의 내면의 진실은 무엇인가 들여다볼 차례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