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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것

-하이디 홀더 <까마귀의 소원>

by 오렌



아주 오래된 나무에 아주 늙은 까마귀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까마귀는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모으기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까마귀의 방은 언제나 온갖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했답니다.

골무, 구슬, 열쇠......

그중에서도 까마귀는 반짝반짝 빛나는 은박지를 가장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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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은 별가루 한 알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습니다.

까마귀는 숨을 죽이고 그 별가루 한 알을 집어 베개 밑에 넣었습니다.

"이것으로 될까? 아! 별가루야. 내 소원을 들어주렴.

나를 다시 젊고 활기찬 새로 만들어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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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부드러운 수채화와 색연필, 펜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과

이야기는 한참을 들여다 보아도 질리지 않고 새롭다.

친구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는 착한 까마귀의 행보는

세월이 지나서 보고 또 보아도 언제나 큰 위로와 교훈과 감동을 준다.


하이디 홀더의 <까마귀의 소원>은 주변에 여러권 선물 했을 만큼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다.

작가 하이디 홀더가 독학으로 배운 그림이라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천이며 단추며 색실이며 돌멩이며 구슬이며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모으기를 좋아했던 나는

이 책의 도입부를 읽자마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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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무렵의 기억인데, 배OO라는 친구가 전학을 왔다.

(아쉽게도 그 친구의 성이 배 씨라는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가 다른 학교에서 우리 반으로 전학 오는 것을 처음 경험하면서 신기했는데,

그 친구는 내 뒷자리에 앉았는지 어쨌건 친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전학생 같지 않게 붙임성이 좋았다.

쉬는 시간이면 내 팔짱을 끼고 교내에 있는 문방구에 가서 지우개나 수첩을 고르라고 했다.

매일 100원을 가져와서 50원어치는 자기가, 50원어치는 나보고 사라고 했다.

지우개나 수첩이 20원 30원 하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50원어치라고 해도 한 개나 두 개도 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미안해하면서 머뭇거리다가 점점 당연한 일과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샀다.

지우개와 수첩과 메모지와 스티커와 편지지가 쌓였다.


2학기 말이 되었을 때 배OO는 다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너무 어려서 연락처를 주고받을 생각도 못했고, 우리는 담백하게 헤어졌다.

배OO가 사라진 이후의 내 인생에서도 나는 꾸준히 문방구를 드나들며

스티커와 편지지와 노트와 칼라펜과 파일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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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 있는 가게에 들러서

좋아라 하는 틴케이스 스티커와 색칠공부용 엽서와 펜과 스티커와 노트와

긁어내면 무지개 그림이 되는 마법 종이를 샀다.

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우산까지 덤으로 샀다.


배 OO가 없어도, 엽서를 보낼 곳이 없어도, 이제 그만 살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반짝이는 것에 현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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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와이드 웹의 물결 속에 떠다니고 있는 옛날 사진을 한 장 건졌다.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모으기를 좋아하던 시절의 나다.


그 옛날, 쉬는 시간만 되면 팔짱을 끼고 문방구에 데려가서 아무런 조건 없이

매일 50원어치의 수많은 지우개와 수첩과 메모지와 스티커와 편지지를 사주었던

배 OO에게, 나에게 충분히 많은 노트와 스티커와 엽서와 펜을 나누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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