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학교> 5화. 무지개 유치원 3
자유 놀이로 시작하는 하루
발도르프 유치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하나의 활동에서 다른 활동으로 넘어가는 전이(transition)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침에 등원해서 실내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놀이를 찾아서 한다. 보통 어제 했던 놀이를 이어서 하고, 이렇게 스스로 자기 자리를 찾는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잘 논다. 그런데, 신발을 갈아 신고 들어와서도 놀지 않고 한쪽 구석에 앉아있거나 선생님 옆에 붙어있으려고 하는 아이는 관심 있게 지켜본다.
단짝 친구가 등원하면 신발 갈아 신는데 까지 놀잇감을 들고 와서 빨리 놀고 싶어 한다.
놀이에 빠진 아이들은 마법에 걸린 듯이 열정적으로 논다.
의지, 감정, 생각이 하나 되는 한 순간의 마법
나를 비롯해서 선생님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했던 아이들 중 한 유형은 선생님 옆에 붙어서 계속 말을 하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 지유(가명)에 대한 기억이다.
"선생님도 고양이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 집에 고양이가 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그 고양이가 물 많이 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요, 그런데요, 말이에요... 장수풍뎅이가 있거든요. 아빠가 지난번에 사 왔는데..."
맥락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줄 수도 없고, 그런 아이는 계속 말을 하게 두지 않고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거나 놀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지유야, 꽃 물 갈아줄까? 꽃이 목이 마르대."
그러면 일어나서 꽃에 물을 갈아주면서 관심이 전환되었다.
선생님, 바빠요?
어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하는 아이는 잘 기억해 두었다가 여유가 있을 때 따로 데리고 단 한순간이라도 진심으로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런 한순간이 제대로 통하면 그 병은 나았다. 사람들이 '귀찮은 아이'라고 생각하는 그 병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 욕구가 좌절되는 마음의 공허함에서 비롯된 병이었다.
한 번은 지유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바빠요?"
다섯 살 꼬마의 입에서 나온 '바빠요?'라는 단어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내 손, 발을 멈추게 했다.
"아니, 안 바빠. 왜? 선생님이 바쁜 것 같아 보여?"
"우리 엄마, 아빠는 바빠요. 이모도 바쁘다고 했어요."
바쁜 어른들이 귀담아듣지 않고 대충 듣는 척하고, "그래. 그래..." 형식적으로 반응하면 아이들은 그걸 알았다.
바쁜 어른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일찍 느끼게 되는 아이는 공허한 마음에 아무 대상에게 불쑥 다가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리고 또 쉽게 포기하고 무기력해진다. 급기야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게 된다.
한자 '바쁠 망'은 '마음이 무너졌다'는 의미라고 한다. 무너진 어른의 마음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었다. 무너진 마음은, 채워지지 않은 갈증, 의미 없는 말을, 대상을 바꾸어가며, 공허하게 반복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선생님은 고양이 좋아해요?"
"고양이 좋아하지."
"진짜요? 우리 집에 고양이 있는데..."
"이름이 뭐야?"
"마리요."
"예쁜 이름이네."
(다음 날)
"지유, 어젯밤에 잘 잤어?"
"네."
"마리도 잘 잤대?"
"......"
지유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날 지유는 내 옆에 붙어서 고양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다. 그날 이후로 지유에게서 더 이상 고양이 이야기와 장수풍뎅이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한번 마리의 이름을 기억해 준 보은으로 지유의 성으로 초대되어 일 년 내내 성대한 공주 대접을 받았다.
놀잇감에 대하여
발도르프 유치원의 특징 중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발도르프 인형으로 대표되는 놀잇감이다.
천으로 된 인형에 털실 머리카락과 바느질해서 만든 옷을 입힌다. 학기 초에는 유치원에 비치되어 있는 인형으로 놀지만, 학기 중에 부모 교육을 통해서 각자 아이들의 인형을 엄마가 직접 만들어서 자기만의 인형을 가지게 된다. 문화센터 등에서 발도르프 인형을 만들 때 눈코입을 선명하고 크게 수놓는 경우가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눈코입을 만들지 않거나 위치를 표시하는 정도로만 실로 살짝 뜬다. 어린아이들은 고착되어 있는 표정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더 풍성한 표정을 보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을 깨끗이 씻고 말려서 바구니에 담아두면 소꿉이 된다.
이러한 과정도 부모나 교사가 다해서 완성된 결과물을 주지 않고, 바닷가에 가서 같이 줍고, 수돗물에 스스로 씻도록 해주고, 쟁반에 놓아서 햇볕에 말리고, 마른 조개껍질을 바구니에 담는 일련의 과정을 아이가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면 놀잇감에 대한 애착과 자신감이 생긴다.
먹고 난 복숭아 씨앗이나 속을 파고 나온 호박씨, 수박씨 같은 것도 모아서 씻어 말려서 놀잇감으로 사용한다.
나무 소재, 조개껍데기, 돌멩이, 솔방울, 호두, 도토리, 씨앗, 천, 펠트, 뜨게, 울(양모)로 만든 놀잇감 등 자연 소재, 형태가 선명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선호한다. 교사는 메인활동이나 링타임, 스토리타임, 식사시간 등 분명한 목적이 있는 활동 이외의 시간에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거나 관여하지 않고 아이들 놀잇감을 만들거나 수선하는 등의 노동과 예술 활동을 한다. 아이들은 노래하면서 일과 예술 활동을 하는 교사의 울타리 안에서 안정감을 가지고 논다.
파스텔 톤의 촉감 좋은 보자기 천은 매우 좋은 놀잇감이다. 여자 아이들은 드레스로 둘러 입고 베일을 만들어 쓰고 공주가 되고, 남자아이들은 천을 어깨에 둘러서 망토로 만들어서 왕자가 된다.
조금 큰 천으로 배 태워주기를 하거나 천 위에 앉히고 끌어서 썰매놀이를 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들일 경우, 양쪽에서 천을 잡고 위아래로 바람을 넣어 흔들면서 노래를 불러주면 천 사이로 통과하면서 재미있어한다.
뜨게나 인형 등은 당장에 만들기 어렵지만, 보자기 같은 경우는 재래시장 천 파는 가게에 가서 손쉽게 마련할 수 있다. 한복 천 파는 곳에 가서 정사각형의 크기를 말하고, 분홍색, 노랑색, 연두색 등 파스텔톤 실크 천으로 사방을 마감 처리하는 형태로 주문하면 된다. 그것을 바구니에 접어서 두면 수많은 형태로 변형시키면서 잘 가지고 논다.
모두가 공주가 되는 법
모두 다 공주 분장을 하고 즐겁게 놀던 중에 자의식이 깨인 일곱 살 아이가 말한다.
"한 나라의 공주는 한 명뿐이야. 그런데 우리는 다 공주니까 말이 안 돼. 누가 공주할래?"
즐겁던 분위기는 갑자기 심각해졌다. 그때 한 아이가 당차게 나섰다.
"내가 공주 할게. 너는 하녀 해."
하녀로 지목된 아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도 공주 할 거야."
"나도!"
"나도!"
한 아이의 문제제기에 잠깐 심각하던 아이들은 공주의 역할을 지키겠다는 용감한 아이의 말에 모두 다 용기를 내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공주 됨을 잃고 싶지 않아 했다.
처음에 의견을 냈던 아이는 당황했다.
"안 돼! 모두가 공주가 되면 다른 건 누가 해?"
그때 반짝이는 한 아이가 말했다.
"그럼 나는 이웃나라 공주 할게. 그럼 되지?"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나도 다른 나라 공주할게."
그렇게 해서 모든 아이들은 각각 자기 나라의 공주가 되었고, 이웃 나라 공주들과 사이좋게 잘 지냈다는 이야기다.
정리의 마법
나비가 높이 날아요
나비가 낮게 날아요
날개를 접고서
친구를 만나요
친구를 만나요
천을 정리할 때 노래를 부르면서 같이 접어서 정리를 한다.
"이제 그만 놀고 정리할 시간이야!"
말로 하면 소귀에 경 읽기처럼,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정리하지 않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재미있게 하고 있으면 서로 하려고 싸울 정도로 순식간에 정리가 된다. 아이들의 언어는 말이 아닌, 노래와 놀이라는 증거다.
오늘의 숙제
가서 놀아라!
잘 놀면 건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