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학교> 20화. <숏숏롱 댄스교습실> 1화. 영혼의 기쁨
내 인생에는 몇 개의 토끼굴이 있었다.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이끌었던 캄캄한 토끼굴처럼 헤어 나올 수 없이 빠져든 블랙홀 중 단연 독특하고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던 하나의 토끼굴을 소개하려 한다. 그것은 바로 인지학의 창시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창안한 '유리드미'라는 동작예술이다.
슈타이너는 이 동작예술이 댄스가 아니라고 규정했으므로 부제로 붙인 <숏숏롱 댄스교습실>이라는 이름이 유리드미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리드미를 희화화한 것처럼 무례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참고로, 유리드미는 영어 이름이고, 독일어 오이리트미로도 불린다.)
유리드미의 정의는 '아름다운 리듬'이고, 그것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음악과 소리를 몸으로 표현하는 동작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슈타이너는 유리드미를 댄스가 아니라고 했지만, 눈으로 보거나 행하는 데 있어서는 통용되는 단어 중 댄스가 가장 보편적으로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이렇게 지어봤고, 또 하나는 댄스처럼 즐겁고 행복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는 사람조차도 설명하기 어려워서 조심스럽다 보니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벽이 너무 높고 두꺼워서 무언가 신비스럽고 이상한, 그들만의 세계처럼 보이는 것도 같아 조금 가볍게 이야기해보고 싶어서다.
내가 유리드미를 체험한 것은 벌써 십여 년 전, 30대 초,중반에서 40대로 접어드는 7년간이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졸업한 유리드미스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당시만 해도 독일이나 영국 등 해외에서 유리드미를 공부하고 들어와서 한국에서 유리드미스트를 양성하는 교육이 막 시작되고 있는 시점이었고, 나는 그야말로 앨리스처럼 지나가다가 토끼굴에 빠져서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듯이 우연처럼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신문에서 본 손톱만 한 그림 하나에 이끌려서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갔고, 그 그림은 영국 발도르프 학교 자폐 학생의 그림이었고, 인간 이해에 대한 방대한 스펙트럼을 가진 발도르프 교육에 이끌려 발도르프 교사 교육을 받게 되었고, 발도르프 교육의 꽃으로 소개되는 유리드미를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교사 교육보다 유리드미 자체에 심취하게 되었다.
춤이 아니라고 했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춤이라고 말하자면, 모든 춤이 그렇듯이 유리드미도 일반적인 걷기와는 다른 이 춤을 추는 용도의 고유한 스텝이 있다. 발끝으로 걷는 것이 발레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걷는 발의 동작을 의식적으로 분화해서 걷는 방식이다.
하나, 발뒤꿈치를 바닥에서 떼고, 둘, 공중에서 발을 이동시키고, 셋, 발끝을 바닥에 착지한다. 하나, 떼고, 둘, 이동하고, 셋, 도착한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걸음마를 배우고 걷고 달리고... 보행의 자유를 이미 획득한 중년의 나는 유리드미 스텝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걸음마를 배우는 듯한 경외감을 느꼈다. 의식적인 걷기 연습을 마치고, 음악에 맞춰서 소품을 연습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유리드미 스텝에서 일상적인 걷기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때마다 선생님은 '발끝!', '발끝!'을 외치거나, 그래도 개선이 안되면 달려와서 매몰차게 노려보면서 '발끝!'을 지적했다.
대지로부터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는 것은 의지(wiling)의 활동이고, 공중에서 발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은 감정(feeling)의 영역이며, 발끝으로 목표하는 곳에 착지하는 것은 생각(thingking)의 일이었다. 앞으로 갈 때는 앞으로 가지만, 뒤로 갈 때는 뒤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앞을 보는 상태에서 뒷걸음치듯이 뒤로 움직이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독특해 보였고, 실제로 움직일 때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만 리듬이 빨라지면 넘어질듯이 위태롭고 불안했다. 의미적으로는 뒷 공간은 영적인 공간이라고 했고, 이러한 동작 하나 하나에 따른 한 마디, 한 마디의 의미를 배우게 될 때마다 나의 토끼굴은, 블랙홀은, 이상한 나라는 어마어마한 전율과 질문으로 폭발하고 팽창해 나갔다.
유리드미는 도레미파솔라시도, 한 음계, 한 음계, 2nd, 3rd, 4th, 5th, 6th, 7th, octive, 모든 음악적인 요소들에 동작이 있고, A, I, U, E, O, 모음과 자음의 모든 언어들, 모든 감정들, 색채, 행성, 조디악, 세상 만물을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이 움직임들은 음악과 소리의 지지를 받았다. 한번 배운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수없이 넘어지면서 익혀지듯이, 단순하고 별것 아닌 것 같은 동작이지만 반복적인 연습을 필요로 하는, 지난한 도제식 수업이었다.
이 공부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설명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어갔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든가, 세상과 멀어지도록 만드는 공부는 옳지 못하다든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아닌 특이한 것에 심취해있는 모습에서 종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든가... 아무튼 그토록 부자연스럽던 유리드미 스텝이 자연스러워지면서 가까운 지인들과 익숙한 세상과 점점 멀어져갔다.
이것은 나만이 아닌, 유리드미를 오래 지속하게 된 동료들도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었다. 이렇게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많이 들여서 다른 걸 했다면 박사 학위를 땄을거라는 둥, 댄스 강사 자격증을 몇 개는 땄을거라는 둥, 이렇게 힘든데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업장소멸의 발원이라는 둥 농담같은 말을 많이도 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하고 있는 나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가슴이 시키는대로 따라갔다.
숏숏롱- 숏숏롱- 짧게, 짧게, 길게. 앞으로, 뒤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위로, 아래로, 움직임이 보다 가벼워지고 빨라지고 정확해지면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말할 수 없는 희열이 되어갔다. 많은 것을 잃으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이상한 나라의 그 희열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영혼의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