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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22. 2021

미래의 장례식

이별의 순간까지 최고로 행복할 것

과거의 나는 꽤 염세적이었다. 연애를 할 때는 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헤어질 사이니까 너무 잘해주거나 사진도 많이 찍지 말아야지.’

‘한가한 시간에 재밌게 지내다 감정이 식으면 적당히 헤어져야겠지?’


이런 생각은 행동에서도 드러난 모양인지, 연애 시절 남편은 자꾸 거리를 두는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이처럼 염세적이고 거리를 두는 생각과 태도는 이별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지금도 이별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나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갈 때 한동안 거리를 둔다. 혹여나 사정이 생겨 사람들과 멀어지는 상황이 두려운 나머지 마음을 터놓고 가까워지는 데 오래 걸린다. 나는 이별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확실한 이별이 정해져 있는 새 사랑을 시작하고 말았다. 모카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이별을 이미 알고도 받아들였다는 의미 아닐까?


어떤 말로도 부정할 수 없는 이별이다. 아무리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고 매사 조심한다 해도 반려동물의 수명은 사람보다 짧을 수밖에 없다. 짧으면 열 살 남짓, 길게는 스무 살 정도 살다 가는 게 반려견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모카를 키우기 전 가장 고민한 부분도 결국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되는 반려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지내자며 모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각오하고 받아들였지만, 모카와의 이별이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언젠가 모카가 죽으면 난 어떡하지?’


평소처럼 모카와 장난감으로 놀아주던 중 갑작스레 슬픈 상상이 떠올랐다. 손을 휘휘 저어 지워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무서운 상상은 한번 떠오르면 쉽게 지워낼 수 없는 법. 모카의 죽음은 미래에 겪어내야 할 나의 현실이기도 했다. 


핸드폰으로 ‘강아지 장례식’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를 제대로 읽기도 전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동물의 죽음이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딱딱하게 아팠다. 여름이를 잃고 겪어본 일인데도 담담해질 수 없었다. 이런 내 모습에 누군가는 십수 년 후에나 닥칠 일에 벌써 눈물바다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신기하리만치 모카의 죽음은 상상만으로도 몹시 큰 위협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검색 결과를 살펴봤다. 검색 화면에는 24시간 운영하는 반려동물 전문 장례식장이 여럿 있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반려동물도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으니 언제든 연락이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장례식장에 연락해 장례식을 예약한 뒤 방문하면 동물 수의와 유골함 등을 선택해 장례를 치르는 듯했다. 


여름이가 죽었을 때는 사망을 확인한 동물병원에 장례를 의뢰했는데, 이제는 직접 장례식장을 선택하고 수의도 입힐 수 있으니 장례방식이 많이 좋아졌다고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방식이 다양하고 선진화된 만큼 홍보내용과 달리 성의 없는 절차로 반려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업체들도 종종 있어 조심할 부분도 있어 보였다.

언젠가 먼 훗날, 나의 반려견도 질병이나 노화로 인해 세상을 뜨게 되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 머릿속에 순서를 그려봤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순간에 곁을 지키고, 사망이 확인되면 미리 선택한 장례식장에 연락해 예약을 하고, 그때까지 깨끗한 수건으로 감싸 시신을 보호하고, 시간 맞춰 품에 꼭 안고 가 헤어짐의 단계를 하나씩 밟아갈 터였다. 


그야말로 십수 년 후에 벌어질 이별은 구체적으로 상상하니 더욱 아팠다. 내 곁에 등을 붙이고 앉아있던 모카를 꼭 끌어안았다.

“모카야, 안 죽고 엄마처럼 오래 살면 안 될까?”

자신의 수명이 얼마쯤인지,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아무것도 모르는 모카는 그저 등을 부비고 혀를 할짝대기만 했다. 


그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내가 상상하고 생각한 내용을 전했다. 염세적인 나와 달리 긍정적인 남편은 이별을 미리 짐작하려 들지 않았다. 

“걱정 마, 모카는 피닉스야. 안 죽고 우리랑 오래 살 거야.”


그 말에 나도 잠시 웃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냈지만, 반려동물의 죽음 이후 절차에 대해서는 남편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그런 대화를 나누며 어느 순간에 응급실에 가야 할지 모르니 계획에 없던 차를 사는 것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모카를 키우기 전부터 남편과 약속한 게 있었다. 혹여나 모카가 죽음을 앞두고 수명을 연장하느라 과도한 의료조치로 모카를 괴롭히지는 말자고, 억지로 모카를 붙잡느라 힘겹게 만들지 말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모카의 죽음을 상상할수록 그 약속을 지킬 자신이 사라진다. 최대한 오래 살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게 모카를 괴롭혔다는 후회가 생길 수 있고, 반대로 손도 제대로 못 써보고 보낸 것에 후회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후회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이별, 모든 반려인에게 예정된 너무 가혹한 이별이다.


예정된 이별에 절망할 미래를 떠올리며 나는 한 가지를 더 상상하게 됐다. 이별을 앞둔 존재, 모카의 마음이었다. 헤어짐을 앞두고 한없이 슬퍼하고 절망할 우리를 보며 모카의 마음은 어떠할지, 모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곳일지 그려보게 됐다. 천상병 시인의 시에 나오듯 모카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행복했다며 눈감게 될까.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고통 없이 행복했다는 마음 하나만 갖고 떠날 수 있을까. 


내가 처할 아픔을 상상하는 데 이어 모카의 시선으로 죽음을 상상하며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나이 먹도록 자신을 어른으로 생각해본 적 없고, 어른스러워지려 노력한 적이 없지만, 모카 생의 가장 끝 순간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에 문득 어른이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배우자로서 남편과 생의 끝까지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한 것처럼, 우리 부부로부터 생의 희로애락이 좌우될 모카의 세상을 위해 나는 이제야 책임감 두둑한 어른이 되고 싶어 진다.


아마 반려인이라면 모두 반려동물의 죽음을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하게 될 것이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그 상상 앞에서 나처럼 눈물을 쏟거나 슬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미리 건강을 잘 챙겨주고 평소 안전에 신경 쓰는 것 외에 이별에 관해 너무나 불리한 반려인의 숙명이다. 


먼 미래에 마주하게 될 장례식을 생각하며 곁의 모카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미리 슬퍼하든 말든 모카는 실타래 장난감을 물고 오더니 놀이나 하자며 나를 부추긴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지금 행복한 것밖에 없다는 뚜렷한 현실감을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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