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밥 Oct 14. 2022

쓰는 자와 쓰는 삶을 사랑하기

쓰는 자를 사랑하고 쓰면서 살아가는 인생

휴대전화 메모장에 항상 저장해두는 글이 있다. 이미 수없이 읽었고, 한 번씩 생각나면 스크롤을 밑으로 주욱 내려 다시 한번 상기한다. 그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이다. 이 상을 받을 당시나 지금이나 예루살렘은 분쟁지역이며, 가자 지구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루키는 주변의 만류에도 그곳을 찾아 상을 받고 연설을 통해 자기 소신을 밝혔다. 높고 단단한 벽 앞에서 깨지는 달걀이 되더라도 영혼의 존엄성을 잃지 말 것을, 전쟁과 폭력을 외면하지 말 것을 알려줬다.


이 연설문은 나를 깊이 감화시켰다. 작가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사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작가는 정치가이고, 노동자이고, 가족이자 타인이고, 탐정이기도 하며 수없이 많은 역할을 맡는다. 하루키의 연설은 그중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알려줬다. 글을 쓰는 게 업인 사람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음을 말이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실천이자 결정이다.


생각하자면 태어나 문자를 배우고 글을 읽게 되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작가의 창작물에 기대 사는 셈이다. 어릴 적 처음 읽은 창작물로서의 동화가 있고,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도 작가가 쓴 창작물이다. 취향이 생성되면서 접한 책들은 어떤 작가가 산고 끝에 낳은 창조물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접하는 삶이 아닌 이상 우리는 작가들이 힘겹게 낳은 창조물을 접하고 습득하며 자란다. 


그 창조물의 무게를 설명하기 어려워 ‘산고’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했다만, 작가에게 창작물이란 애초에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행위만 하고 나머지는 온통 창작에 투자하며 글을 쓰는 작가가 있고, 쉬엄쉬엄 놀 듯이 쓰는 작가도 있다. 쭉쭉 나아가지 않아 고통스럽지만 목표를 위해 자신을 깎아가며 쓰는 작가가 있을 테고, 일종의 대나무숲이자 자신만의 메타버스를 만들 듯 글을 쓰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에게 창작물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하다. 


어릴 적부터 많은 책을 읽었다. 집에 홀로 남은 시간이 많아서였다. 집에는 하도 오래돼서 작은 벌레가 나오고 종이가 누렇게 뜬 <한국의 역사> 20권 세트가 있었고, 고전을 어린이용으로 제작한 도서 세트도 있었다. 처음부터 책이 좋았던 건 아니지만 딱히 할 게 없어 읽기 시작한 게 취향이자 취미가 됐다. 


그 책들은 분명 작가가 존재하는 책들이었고, 그 작가들의 창작물을 읽고 먹고 자란 덕분에 지금의 생을 살고 있다. 뭐랄까, 이 역시 단순히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어릴 때부터 곁을 지켜준 책들이 있었고 그 책을 쓴 작가들은 나의 보모이자 영양사이자 선생님이었다. 

곁을 지켜준 선생님 중 막강한 영향력의 선생님을 꼽아보자면 온 마음을 다해 존경하고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마음속 1번이다. 사람들은 흔히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하루키빠’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다소 저렴해 보이는 ‘빠’라는 한 글자로 나의 애정을 담고 싶진 않다. 


다음은 박완서 작가와 법정 스님이 순서를 받는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이미 작고하셨다. 두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기적이게도 ‘아, 이분들의 차기작을 만날 수 없다니!’하고 통탄한 다음에야 슬퍼했다.


공지영 작가와 김애란 작가는 내게 잘 크라며 고봉밥을 먹인 셈이고, 황선미 작가의 산문은 내가 글을 쓰는 데 큰 영향을 줬다. 언제였던가, 원고를 응모했던 어느 작은 공모전은 심사위원의 이름에 황선미 작가가 있던 게 지원 사유였다.


일본의 에쿠니 가오리는 게으를 틈 없이 뭐라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밤잠 못 이루고 책에 매료되는 힘을 가르쳐준 스파르타식 선생님이었다. 몇 해 전 작고한 후에야 접한 황현산 작가는 ‘네가 쓴 글이 얼마나 초라한지 살피고 다시 수정하라.’라고 무언의 엄호를 놓는 선생님이다. 한 문장, 한 문장 허투루 낭비하지 말 것을 조언한 선생님은 김훈 작가다. 최근에는 김초엽, 천선란 작가에게 깊이 빠졌다. 


앞선 작가들이 먼저 갈고닦아 만들어놓은 글의 터전에서 나 역시 작가로 자랐다. 작가가 되긴 했지만 천부적인 재능이 있거나 남들의 이목을 제대로 끄는 재주가 없다. 그래도 매일 서재에 앉아 단 몇 줄이라도 써보려 하고, 그러다 보면 그야말로 ‘뭐라도’ 쓰는 삶이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작가의 종류로 치자면 쭉쭉 나아가지 않아 고통스럽지만 목표가 있으니 어떻게든 앉아 창작의 용광로에 몸을 녹여가며 쓰는 타입이다. 그 와중에 사회적 책임에 동참할 기회가 주어질 땐 녹다 만 몸을 사리지 않고 손을 뻗는 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예루살렘상 연설에서 “소설가는 독특한 부류이며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거나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본 것이 아니라면 진심으로 믿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쓰는 삶이란 미치게 갖고 싶을 만큼 아름답지만, 그에 준하는 고통에 사사로이 몸부림치는 생이다. 직접 경험한 것만을 지독하게 신뢰하며, 고집하고, 주장하고, 미움받더라도 할 말을 끝끝내 하며 글의 터전에 벽돌 하나를 얹는 생이다.

 

어릴 적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내게 “밥 빌어먹는 직업이라 안된다.”라고 못을 박던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다행인지 밥을 빌어먹진 않고, 정직하게 쓰고 말한 만큼 벌어서 먹는다. 비록 유명한 스타 작가는 아니지만, 쓰는 자를 사랑하고 쓰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나는 참을 수 없이 자랑스럽다.

이전 12화 널 사랑할 수 있어 다행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