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시계, 그게 뭐라고

by 딸리아

1984. 10. 21

제목: 시계

이번에 시계를 살 가능성이 없어졌다. 월례고사에서 5등 안에 들면 ‘탁상시계’를 사주겠다는 엄마 말씀을 듣고 다른 때 보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점수가 마냥 그렇다.
요즘, 그냥 머리가 아프다. 시험을 잘 본 애들이 많기 때문이다. 5등 밖으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5등 안에 들면 탁상시계, 2학년 끝날 때 우등상 받으면 손목시계를 사주겠다고 하셨는데, 5등도 저리 가라이고, 무슨 놈의 우등상은. 다 헛된 일이 될 것 같다.
평균이 영 시원찮다. 90점 넘은 과목이 하나도 없다. 다음 월례고사와 학기말고사를 잘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대단히 크다. 학기말고사는 그럭저럭 본다지만 월례고사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영 시계를 못 사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계를 사야 한다. 이번 학기말고사와 월례고사 때 시계를 사야 하는 것이다.


1984. 10. 24

제목: 가망

시계를 살 가망이 높아졌다. 22일에 나는 맞지 않았다. 성적이 떨어지면 등수만큼 맞는 건데 난 제외되었다. 저번에 7등이었는데 안 맞았으니까 7등 이상이라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5등 안에 들 것 같지는 않고 6, 7등이 아닐까 싶다.
7등이면 시계는 저리 가라이고, 6등이면 엄마아빠한테 아양을 떨어서 시계를 사야지, 5등 이상이면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하게 시계를 사러 갈 것이다.
7등 말고 5, 6등 했으면 좋겠다. 가망이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1등은 보매, 2등은 선경 또는 지영…
'보매'는 어떤 기분일까? 평균이 95점이라는데, 난 85점이니 차이가 너무 크다. 큰일이다. 가능성을 찾아 돌진하는 수밖에 없다. 난 꼭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리라.


1984. 10. 31

제목: 통지표

오늘 통지표를 받았다. 6등이었다. 평균은 예상보다 1점 올라서 86점이다. 도덕은 예상보다 5점이 올랐고, 음악은 1점, 가정은 8점, 수학은 4점, 사회는 2점이 올랐다. 좀 기뻤다.
그래도 6등이라서 기분이 좋았는데, 통지표를 자꾸만 보니까 별로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기뻤다. 그것은 시계 때문이다.
엄마가 저번에 5등 안이라야 사준다고 했다가 6등 해도 사달라고 졸라서 사준다고 했는데, 엄마는 오늘, 내가 언제 그랬냐고 5등 안에 들어야 사주겠다는 것이다.
6등을 했든 5등을 했든, 사주기도 싫으면서 괜히 약속을 한 엄마가 미웠다. 10등 안에 들면 항상 1천 원을 받았는데, 그 돈이라도 달라고 하니까 “다음에 준다”라고 미루는 엄마에 화가 나서 울었다. 약속도 지키지 않으면서 약속을 한 엄마가 미웠다.
자꾸 눈물이 나왔다. 이제부터는 엄마하고 약속은 안 할 것이다. 엄마는 전부터 못 믿었지만 오늘도 역시 못 믿겠다. 아빠하고 약속을 하겠다.
시계도 안 사주고 돈도 안 주면 무슨 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말도 없으시고. 통지표를 찢고 싶었다. 공부도 싫고 다 싫었다. 용기가 없어서 찢지 못했지만 정말 기분이 나빴다.
아마 화가 나서라도 공부를 안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약속도 안 지키고 의욕마저 사라졌다. 시계 사주면 시간 잘 맞추어서 공부도 더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1984. 11. 1

제목: 후회

어제 나의 생각과 행동이 나쁜 것임을 뉘우쳤다. 화가 나서 울고 언니한테 하소연하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내 행동이 우스웠다. 바보짓은 정말 혼자서 다 하는 것 같아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내가 밉기만 하다.
오늘 엄마가 시계 사준다고 하셨지만 안 사기로 했다. 공부는 자기가 하는 만큼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시계가 별로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돈 얼마 주면 학용품이나 사고 끝내겠다. 굳이 달라고 조르지 않고 주면 받고 안 주면 안 받고 하겠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성적에 대해서 내기는 안 걸겠다. 성적이 좋으면 내가 좋은 것이고 엄마아빠는 돈이 좀 나가고. 나만 좋고 엄마아빠께서는 좀 그래서 내기 안 걸고 열심히 하겠다. 그리고 정말로 어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했으면 좋겠다. 바보가 되기는 싫다.
keyword
이전 04화체벌, 공포와 불안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