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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Nov 08. 2024

로망은 로망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갭이어 일곱째 달

수면은 뇌를 쉬게 하고, 많은 고민과 문제들로 감당이 안 될 때 자동적으로 고민과 기억을 정리해주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뭐 할까, 뭘 먹을까 외에 고민거리도 별로 없이 살고 있는 나의 수면시간은 왜 매일 8시간 이상인가. 아무리 늦은 시간의 기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는 하나, 수면의 총량 면에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소중한 나의 24시간 중 3분의 1을 잠으로, 침대 위 이불속에서 보냈다. 기존의 나는 수면이 약이고, 밥보다 수면이 우선이고, 수면은 건강한 생활의 근원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그저 게으름의 증거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동안 못 잔 잠 몰아서 자나 보다는 이해와 이렇게 계속해서 숙면을 취하다니(올 초부터 아침마다 수면패턴을 체크하고 있는데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매일은 아니지만)라는 감동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노력으로 어쩔 수 없었다. 몸이 그냥 잠을 자는 걸 어쩌란 말인가. 잠도 자면 잘 수록 늘어남이 확실하다. 


잠 말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끼니 해결하기였다. 독립을 시작하던 때부터 요리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만, 몇몇 이유로 영 실천을 못하던 나는 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식사를 스스로 준비해 먹어보고자 했다. 그랬었다. 

현실은? 로망은 그저 로망일 뿐이었다. 장난감 같이 귀여운 밥솥은 몇 년 전 1인분 밥 짓기를 실현한 이후, 단 한 번도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요리 대신 배달, 배달 대신 픽업. 그나마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후 빠졌던 라면을 끓이거나(이마저도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쯔유에 담가 먹을 메밀면 삶느라 몇 번 불을 사용한 것이 전부였다. 사실 대부분 나의 식단은 친구들이 정체불명이라고 하는 생식과 재료 조합 위주다. 햇반이랑 사온 반찬으로 밥을 차려 먹으면 좀 다행인가 싶지만, 여기서 개인적인 딜레마가 발생한다. 기후위기를 떠들어대던, 일회용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고 유난을 떨던 나의 모습과 다른 행동에 자괴감이 들뿐더러 두어 번 사 본 반찬가게 출신 반찬은 한 번 먹으면 맛도 그렇고 냉장고 보관이 그닥 땡기지 않아 선뜻 들이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는 집 근처 믿을 수 있고 맛있는 반찬집 하나 있는 것이 필수라던데. 어쨌든 요리와 상차림은 매우 다른 세상이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해서인지, 아니면 날이 습하고 더워서인지 청소도 빨래도 귀찮아졌다. 

먼지가 떨어져 있거나, 얼룩이 있는 걸 보지 못해 열심히 청소를 하면서 청소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빨래도 종류별로 나눠 세탁기 돌리고 손빨래를 하면서 빨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버리고 쓸고 닦고, 빨래하고, 화장실 줄눈과 변기를 청소하고... 이 모든 것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 방편이었나 보다. 청소를 하고 나면 청소기 먼지통과 필터를 다시 청소하는 과정과 세탁기를 돌리고 나면 먼지거름망을 세척하는 과정이 과한 수고로움으로 느껴졌다. 덩달아 최소한의 의상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빈번하게 등장하다 못해 내 캐릭터와도 같은 귀차니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소하게 이어가는 일상과 만남을 통해 이따금 느끼는 활력 사이에서 시소 타기를 하는 그때 슬픈 이별이 있었다. 공연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인연을 맺게 된 대표님이셨다. 그 전날밤은 태풍도 아닌 것이 태풍이라도 온 것처럼 바람이 거세게 많이 불었다. 여느 때보다 일찍 1시를 조금 넘겨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리저리 뒤척이느라 3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그 밤과 빛을 넘어 대표님은 유명을 달리하셨나 보다. 선생님과 완전히 이별하는 날은 무척이나 높은 습도에 이른 아침부터 더웠고, 많은 이들의 슬픔으로 숨이 더 콱 막혔다. 

돌이켜보면(시간이 많으니 어쩔 수 없이 나의 시간과 나를 돌아보는 시간 또한 많다) 그곳과 그때 만난 사람들은 운이었고, 원동력이었고, 기반이었고 지금까지의 나를 있게 한 시작이었다. 올 한 해 나의 변화와 더불어 그곳의 변화로 인해 마음속 어느 한 시대가 뭉툭하게 뜯겨나간 기분이었다. 


공연일을 시작하면서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좋아서, 신나서, 미쳐서 때로는 책임감이란 이유로, 또는 내 감정에 빠져 한 일이었지만 상당히 많은 것을 '바쁜 일' 탓으로 돌렸고, 변명으로 삼았다. 그걸 나의 가족과 친구들은 수용해 주었다. 

그런데 이쯤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알 것 같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내가 일 탓으로 돌렸던 것 중 상당 부분은 그냥 나의 성격과 정신, 인간이라는 동물의 노화, 그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시간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뿐이라는 걸.  

집에 있으면서도 나는 

그닥 쓸모도 없는 일정으로 시간표를 짜고 (계획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시간의 빈칸을 무언가로 채우려 하고 (없어서 허전해하고),

여전히 전 직장과 분리가 되지 않아 우리란 말이 먼저 나오고 (동료들 얘기를 들으며 안타까워하고),

쉬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개선되어 활력 있는 몸이 되리라 믿고 (따라주지 않는 몸에 실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하든 하지 않든 나는 나였고, 누구나 비껴갈 수 없는 노화와 조금씩 또는 조금 많이 가지고 있는 현대인의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심지어 퇴사 후 사라졌던 이명도 다시 생겼다... 내 믿음이 거짓으로 판명된 것 같아 좌절ㅠ.ㅜ 

환경으로 인해 사람이 영향을 받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조금 다를 수 있었을까. 


그렇게 덥고, 우울하고, 게으르고, 자책하고, 그래도 자고 먹고 가끔 재밌고 하는 한 달을 보내다가 문득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7월의 마지막 날을 2-3일 앞두고, 언덕길을 오르다가 불현듯. 

'나 에너지가 좀 찬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일 좀 할 수 있겠는데?' 

라는 생각이 정말 말 그대로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다. 

왜? 어떻게? 어쩌다가? 이렇게 순간적으로? 진심이야? 




이달의 목표였던 퇴사와 갭이어 관련 브런치북 연재는 다행히 시작했고, 

파인더스 클럽의 남은 반인 두 번째 달까지 잘 마무리하는 건 실패했다. 이유는, 내가 다른 이들만큼 열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란도 있지만, 꿈이 있고, 일이 있고, 휴식이 있고, 목표가 있고, 책임이 있고, 개성이 있고, 능력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한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하며 바라만 보는 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의 성공과 반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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