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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Nov 15. 2024

이 모든 건 날씨 탓, 아니 시간 때문인가

갭이어 여덟째 달

아주 가끔 이런저런 계기로 내가 얼마나 쉬었는지를 생각할 때가 있다. 그 말은 곧 대부분의 시간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공백기를 보내는 중이라는 생각을 특별히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반에야 특별한 휴가를 얻은 것 같고,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 같고,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매일 그리고 자주 기분 좋게 새삼스러웠지만, 어느새 출퇴근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하루하루도 특별할 것 없는 그저 내가 살고 있는 하루하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깨닫는 것 또한 인식을 한다는 것이니, 그 마저도 유난스럽다. 그저 밥 먹고 숨 쉬고 일상의 활동들로 채워지는 시간이다.

그러다 가끔 기간을 가늠하게 될 때, 6개월째까지만 해도 마지막 출근 다음날부터 시작할지, 퇴사일 다음날부터 시작할지 살짝 헷갈렸다. 그런데 8개월째가 되고 보니 망설임 없이, 그보다 더 악착같이 행정적으로 소속이 없게 된 2024년 1월 1일부터로 세기 시작했다. 그렇다. 갭이어를 보내는 중이라고 해도 좋고, 백수라고 해도 좋고, 휴식기라고 해도 좋을, 사실 나밖에 관심이 없는 탓에 뭐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 시간을 보낸 지 이제 8개월이 되었다. 


그리고 미뤄두었던 고민을 결국은 꺼내든 것인지,

아니면 이제야 고민이란 걸 해 볼 엄두가 난 것인지 

둘 중 뭐가 더 나은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즈음되니 '일'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들어왔다. 


가끔 묻는 사람들이 있다.

“오라고 연락 오는데 많지 않아?” 

"사람들이 널 놀게 내버려 두냐?"

사실 그렇지 않더라. 그런 연락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걸까? 

드라마에서 보면 직장을 다니는 중에도 그렇고, 퇴사한 능력자들에게는 어디선가 은밀한 연락이 온다. 사람들은 능력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 연락을 받은 그들은 포멀한 의복을 차려입고 조용한 카페에서 미팅을 하며 조건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혹여 연락이 없더라도 능력자들은 하고 싶은, 또는 할 일이 많다. 본인의 잊어버렸던 꿈을 찾거나, 고이 간직하고 있던 계획을 드디어 펼치거나, 새로운 것을 찾는다. 어쩜 그렇게 그들은 꼭 꿈이나 자신조차 몰랐던 능력 하나씩은 다 갖고 있는 걸까. 

그들과 달리 나는 그냥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평범한 한 명일 뿐이었다. 아이쿠~ 여기서 미래에 있을 나와 당신 모두의 오해는 금물. 그런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주변의 얘기에 새삼 상기되어 기다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은 했을지언정, 누군가 나를 찾아주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아마도 혼란스러웠을 테지. 


하지만 이 즈음되어 일을 해야 할까…를 잠시 생각했던 적은 있다. 아마도 이 시점 이후로 가끔 떠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 퇴사 후 처음으로 채용공고문을 열어보기도 했다. 고민이 되기는 하였으나, 마음이 가지 않았다. 모든 채용이 그렇듯 지원한다한들 합격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매끈하게 동하지 않았다. 

충분히 논 것도 아니고,

충분히 나를 들여다본 것도 아니고, 

충분히 주변을 둘러본 것도 아니고. 

얼마만큼이어야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과연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는 할까. 앞으로 시간을 더 들인다고 무언가 달라지기는 할까. 


경제적인 문제로 조급하게 일을 구하지는 말자고 마음먹었으나(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일을 선택하는 시점에는 아마도 사회활동보다는 경제활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더 큰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난데없이 집주인이 집을 매매하려 한다는 연락을 받은 후에는 더욱 그랬다. 내가 통장을 파먹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노동을 통한 경제적 생산활동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부를 늘리기 위한 투자활동을 하고 있다. 또 누군가는 부수적인 수익창출을 위해 파이프 라인을 늘리는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나의 지금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나, 아주 가끔 나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를 생각하곤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함으로써 꾸준한 수입이 생겼다. 나 아닌 다른 이를 부양해야 하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당연한 인과관계와 상황마저 운이 좋은 거라는 걸 사회생활을 하며 많이 목격하고 경험했다. 적고 많고를 떠나 수입이 있다는 것은 매우 안심되는 일이다. 별 고민 없이 지출함으로써 매일매일 내 깜냥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얻거나 몸을 편하게 할 수 있고, 부족하면 조금 모으면 되고, 감당 못할 큰 수요에 가끔 아쉬움과 좌절이 따를 때도 있지만 이내 내 것이 아닌냥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 분수가 만들어진다. 적고 보니 씁쓸하네. 

놀면서 지출의 규모를 줄이고 싶지 않다고는 했으나, 어쩌면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수입과 지출에 대한 의식이 (당연히도)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소하게는 짐이 있어도 택시를 타지 않고, 외출빈도를 고려할 때 일반 교통카드와 기후동행교통카드 어떤 것이 보다 이익인지 따져 본다. 카페에서 파는 남이 내려준 커피보다는 네스프레소를 마시고 드립으로 건너가고(라떼가 좋아 ㅠ.ㅜ), 외식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하고, 읽지도 않는 책을 수집하기보다는 도서관에서 읽을 책을 빌려 읽는다. 큰 지출은 어차피 자주 발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 소소하지만, 분명히 달라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전히 여행을 꿈꿨다. 


하지만 '일'을 생각하면, 다시 사람들과 부대끼며 반복되는 고민과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매 순간 줄타기나 시소 타기를 하는 느낌. 한 때는 희열을 느꼈으나, 어느 순간 버겁기만 했던 그 시간들이 지금도 역시 무겁게 느껴진다. 과연 내가 다시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오래 쉬면 다시는 일 못한다 했던 누군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래 쉬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퇴사를 결정하기 전 노는 게 좋다는 이들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지금의 나는 '나는 다를 거'라던 그때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전혀 지루하지 않게 백수 생활을 잘 지내고 있는 내가, 과연 다시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운 내가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어쩌면 그때의 내 예상과 기대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면서 동시에 드라마 속 치열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열정과 대리만족을 느끼고, 동료들이 의기투합해 난관을 헤쳐나가는(이 얼마나 상투적인 장면인가) 걸 보며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낀다. 심지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박수를 치거나 눈물까지 흘린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또한 나와 나의 일 그리고 동료들을 다른 이들과는 조금은 다른, 그보다 더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건 내 기억과 감상에서 새롭게 빚어진 달콤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재의 나에게는 꿈과 환상이 가득한 잔혹동화다. 


지난달, 7월의 마무리에 불현듯 에너지가 찼다고 스스로 느낀 건 순간이었고, 그 느낌은 2-3일 후 곧 사라졌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런 기분이었다는 것만으로도 꽤나 고무적이다. 잘 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과하게 뜨겁고 더운 날이 이어졌다.

뜨거운 날이 좋은 때도 있었다. 더위만 피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워 다른 불만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최소한의 외출을 했지만 계곡 옆 음식점에서 피서 기분을 낼 수 있었고, 멀리서 온 친구를 만나 서로의 일과 휴식을 응원하기도 하고, 전시도 보고, 그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시원한 집에서 꼼지락거렸다. 오래도록 쌓아두기만 했던 책도 들춰보고, 어렸을 적 편지나 일기들을 꺼내 보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게다가 이 더위에 출퇴근을 했을 생각을 하니, 집에 있어도 된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했다. 내가 선택한 시간에 선택한 장소에 머물면서 선택한 행동만 해도 된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노는 자의 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날씨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잠은 많이 자는데 잠에 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자다가 계속 깨 수면의 질이 떨어졌다. 그래서 낮잠이 필요했다. 낮잠을 자니 몸이 개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늘어졌다. 몸과 마음 모두 뭔지 모를 불편을 느끼며 하루종일 켜 놓는 에어컨 바람과 밤이면 유난히 크게 들리는 냉장고 소리도 신경에 거슬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신체적인 편안함이 조금씩 무너지니 마음의 평정심까지 흔들리는 경우가 생겼다. 


또다시 한 달을 채워가는 8월이자 8개월째의 마지막,  

아주아주 오랜만에 다시 버릴 것을 찾아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안다. 무언가 머리가 찝찝한 것이다. 




이 달의 목표는 루틴을 다시 찾아보자였다. 

신기한 게 무슨 이유로든 조만간 아니면 언젠가 멀지 않은 시점에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채워가던 나만의 충실함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일을 면 더 놀지 못한 걸 후회할 거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날을 받아둔 것도 아닌데 루틴이 흔들리고, 게을러지고, 나태해졌다. 마치 잘 쌓아 놓은 탑에서 블록을 하나씩 꺼내 작은 구멍이 점점 많아지고 위태로워지는 젠가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뭐, 이 달의 목표는 대략 실패. 어쩔 수 없다. 이놈의 날씨 같아서는 어디서 무엇을 해도 이 모양이었을 거라고, 치사하지만 핑곗거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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