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 열 달째
지난달의 긴 추석 연휴에 이어, 10월 초반에 가득 자리 잡은 징검다리 휴일이 계속 신경 쓰였다. 직장인들이 들으면 하루가 아쉬운데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1년 전의 나였어도 그랬겠지만 정말 알알이도 콕콕 박혀 있는 빨간색 휴일이 너무 많아 보였다. 달력의 숫자가 까맣게 표시된 날 아침이면 출근을 해야 하고, 빨갛게 표시된 날을 기다려 게으름을 피우거나 하고 싶지만 미뤄두었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직장인도 아닌데 왜 그리 신경이 쓰였던지.
“백수가 주말이고 공휴일이 무슨 상관이야?”
친구는 말했다. 그 말에 공감이 되면서도 뭔가 계속 정체 모를 불편감이 있었다.
아마도 관성 때문인지 빨간 날은 무엇이 되었든 까만 날과는 달라야 하고, 그래서 다른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리 매일을 정해진 일정과 장소 없이 지낸다 하더라도 분명 까만 날과 빨간 날은 다름이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말이다. 두 가지 컬러뿐이지만 강렬한 리듬감을 가진 이 시기의 달력과 달리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음에 약간 머뭇거렸던 것 같다. 그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택에 잠시 당황을 했던 게지. 그나저나 '나는 그냥 백수가 아니라 '갭.이.어.'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고민이 고민이라고, 가만 보면 참 별게 다 고민이다. 일 때문에 해결해야 할 일이 많고, 덩달아 고민거리도 많은 때에는 일과 문제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거의 습관처럼 루틴에 따라 이루어졌다.
출근시간에 맞춰 최소한의 준비와 이동시간을 고려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출근길 지하철은 몇째 칸 몇 번째 문(환승 통로와 최대한 가까우면서도 너무 가까우면 사람들이 많이 몰려 혼잡하니 1칸 정도 떨어진 곳)에서 타고,
지하철역을 나와 버스가 2-3분 내에 오면 버스를 타고 그보다 길어지면 걷고,
출근길에는 날이 덥든 춥든 따뜻한 라떼 한 잔, 배고프면 생크림이 얹힌 걸로 바꿔주고,
점심은 팀 친구들이 먹고 싶거나 추천하는 것으로(심지어 코로나 때는 줄기차게 포케와 타코로, 근무 막판에는 줄기차게 김밥에 편의점표 된장국을 먹었다. 점심시간은 즐겁지만 먹고 싶은 게 딱히 없었을뿐더러 혹시나 먹고 싶은 게 생긴다면 거의 9할은 떡볶이였다. 식성이 참 단조롭다.) 해결하고,
막히는 시간을 벗어난 퇴근길은 버스로 이동. 이런 식이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 시간을 다투는 사안이나 문제들이 없다 보니, 별 사소한 걸 다 고민한다. 따지고 보면 진정한 고민이라기보다는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외출할 때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아침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실지, 따뜻한 라떼를 마실지,
식사는 외식을 할지, 배달을 할지, 픽업을 할지, 집에 있는 걸로 간단히 챙겨 먹을지,
엄마집에는 갈지 말지, 간다면 토요일에 갈지, 일요일에 갈지,
오늘은 무엇을 할지.
이걸 선택하든, 저걸 선택하든 대세에 전혀, 정말 완벽하게 전혀 문제가 없는 것들을 결정하지 못해 갈팡질팡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또한 이렇게 고민 없이 살아도 되나 싶은 생각이 고민일 만큼 마음의 짐이나 고통이 거의 없는 상태로 지내고 있는 나도 발견한다. 하지만, 고민의 경중뿐만 아니라 가짓수도 뇌의 용량을 차지해 처리 속도를 늦춘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고민답다 수긍이 안 되는 것들도 고민이라고, 한 없이 가볍고 사소한 고민의 가짓수가 늘어나니 은근슬쩍 평정심이 흐려지고, 덩달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걱정거리가 등장했을 때의 불안감을 진중하게 감당하는 것이 수월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고민과 불안의 해결이 아니라 재빨리 벗어나고만 싶은 심리가 걱정 스위치를 끄고 어두움에 가둬버리는 상태를 왔다 갔다 했다. 나는 생각이 없소이다, 그러므로 곧 고민도 없소이다.
하지만 슬쩍 잊혔던 불안은 다시 등장할 때마다 크기가 조금씩 커져갔다. 불안은 헐거운 현재보다는 대부분 미래를 향해 있었는데, 1년이라는 완성된 시간의 시점이 다가오기 때문인지, 몇몇 이벤트들로 인해 나의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둘 다이지 싶다. 사회적 기준에 따른 나의 현실은 내 세상에서 생각하는 현실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비슷한 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중단기 목표를 향해 가는데 급급한 때문이기도 한데, 대세나 주류인 사람들의 사회적 가치와 지향점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운 좋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허락된 인생이거나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둔감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와 내가 몸담고 있는 현장이 세상의 다른 씬들과는 다르다는 오만함의 연장선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기 최면과 착각이 있지 않으면 오래 버티기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히 그리고 다행히(정말?) 항상 불안 속에 있거나 갈팡질팡 하지만은 않았다. 이 와중에도 끝없이 행복으로 흥분하는 순간들이 있었 아니 많았으니, 이건 뭐 ‘미친년 널뛰듯’ 한다는 표현이 딱이다.
과거에 한 친구가 말했듯이 노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잘 놀기 위해서 노력했다.
여름부터 매달 시도하고 있는 수영강습 신청은 이번 달도 실패했고,
무언가 배워볼까 했던 마음은 정보를 검색하는 수준까지 올라왔고(비록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좋은 날씨 덕에 서울숲에 산책 겸 사진도 찍으러 가고(도대체 언제 적인가? 숲이 조성되었던 초반에 사진 찍으러 갔었다는데 전혀 기억에 없다. 넓기는 한데 사람들이 왜 그리 좋아하는지 이해하기엔 경험치가 미천하다. 근처에 사는 이들 한정 산책 편의성과 접근성 차원에서는 이해가 되었지만),
처음으로 노들섬에 피크닉을 가고(머리 위 해가 건물 사이로 기울 때까지 긴 시간 앉아있었는데, 이래서 사람들이 많이 오는구나... 서울숲과 달리 단번에 이해가 됐다),
신나게 우중 라이딩도 하고(더 빨리, 조금 더 빨리! 빗속을 가르는 속도에 신이 나 방심한 탓에 심하게 덜컹거리는 길을 달린 다음날 허리에 탈이 나고 말았다. 결국 더 이상 타지 못하고 자전거 반납),
1년 만에 머리 염색도 하고(검은 머리 반, 노랑머리 반으로 산발을 하고 다니다가 염색을 하니 세상 달라 보인다. 퇴사 후 커트를 하지 않고 길러 거의 10년 만에 나름 장발이 되고 보니 낯설어하는 사람도 있고, 기분전환이 확실하다),
고창과 군산으로 짧은 여행도 가고(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떠남은, 자연은, 새로운 것은, 친구는 좋다. 자전거 때문에 안 좋은 허리로도 탁구를 어찌나 열심히 쳤던지,라고 말하면 양심상 찔리고 못 치는 탁구에 어찌나 탁구공을 열심히 주웠던지 악화일로를 걷는 허리 때문에 결국 병원 신세),
친구네 가족을 만나 맛난 밥도 먹고 애정하는 아이와도 놀고(멀리 사는 친이모를 제치고 제일 좋은 이모로 당첨되는 행운이라니!),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집 앞에서 흰 양말을 신은 새까만 아가 고양이를 보고(혼자서 간신히 비틀거리며 걷는 수준인 아가인데 엄마 냥이 따라 용감하게도 먼 길, 인간에게는 길 건너 집, 여행을 떠나 이곳에 당도했다. 낯설고 거대한 움직이는 생명체를 맞닥뜨려 숨느라 정신이 없는데, 엄마냥이가 생명체의 눈을 따돌릴 수 있을지 가늠이 안되었겠지. 며칠 지나 영상을 하나 받았는데 그 사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아가냥이가 되었다. 너무 신기해),
SNS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도 눈에 띈 가사 공모전에 응모도 하고(공모전이라고 해봐야 마감일은 있으나 결과 발표일과 방식에 대해서는 나와있지도 않은 허술해 보이는 그런 공고문),
무슨 정신으로 아파트 청약공고도 신청했었다.(신청 후 딱 하루 설레고, 발표 전까지 남은 모든 날은 나의 섣부른 행동을 자책하며 어찌나 롤러코스터를 탔던지. 결과 발표 후 한숨 돌렸지만, 간혹 찾아오는 넘을 수 없는 경제 이슈로 인한 좌절감을 감당하는 것은 여전한 나의 몫이었다)
가을다웠던 10월은 고민과 불안이 무색하게 신나거나 스펙터클한 순간들이 한 바가지였다. 이것이 과연 시간 부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이달의 목표는 자전거 꾸준히 타기였으나 완벽한 실패. 나의 자전거를 응원해 주는 주변도 있었지만, 과연 괜찮을까를 우려하는 주변도 있었다. 몸이라는 건 의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있는 것일까. 나도 소근육 날렵하게 선 몸을 지니고 싶다.
두 번째 목표, 엄마의 일기장 편집하기. 지난달, 오래도록 쌓아두었던 내 짐 사이에서 무려 25년 전 엄마의 일기를 우연히 발견했다. 어떠한 에러로 컴퓨터 파일이 날아가 너무 많이 속상해했고, 지금까지도 가끔 떠올리며 아쉬워했었는데, 요즘은 리더기도 거의 없는 플로피디스크에, 무려 훈민정음 파일(그 옛날 삼성에서 컴퓨터를 만들어 팔면서 한글이나 엠에스워드가 아닌 훈민정음이란 별도의 프로그램을 사용했었다. 도대체 왜!)로 작성돼 있는 걸 찾은 거다. 분명한 엄마 글씨로 적힌 라벨이 붙은 플로피디스크를 발견한 순간, 리더기를 구해 디스크를 연 순간, 기억 저편에도 존재하지 않는 gul이라는 확장자명으로 저장된 파일을 발견한 순간, 그 파일이 열리지 않는 순간, 복구를 위해 갖은 애를 쓰고 나서 드디어 파일을 연 순간, 프린트해 엄마에게 처음 전달한 순간과 엄마의 반응까지... 커다란 흥분과 긴장감 도는 가슴떨림은 잊을 수 없는 감각이다. 프로그램 변환 때문인지 편집상태가 깨져 있고, 내용도 사라진 전체의 일부라 아쉬웠지만 엄마의 동의를 받아 내용을 읽어가며 문서 파일 편집 작업을 했다. 머잖아 책으로 한 권 묶어드리려고 한다. 오래전 엄마 나이 일흔에 책으로 만들어주겠다 했던 오래전 나의 약속을 엄마는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