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 열한째 달
널을 뛰던 감정은 안정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급격한 좌절과 비관 모드에서는 일단 벗어났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올 12월까지는 맘 편히 놀고, 내년은 내년 1월부터 생각하자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다. 다만 감정이 오르내리는 최고점과 최저점이 조금씩 낮아지고 높아져 중간에 수렴하는 형태를 보인 정도. 결국은 또 한 번의 (내적) 갈등 회피와 미루기일 수 있지만, 동시에 최초 계획했던 갭이어 1-2년의 최소 1년을 보장해주고 싶은 그리고 1년을 달성하고 싶은 나만의 다짐일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만만디의 시간을 애써 허락하였으니, 나중에 아쉽다 군소리할 생각은 말지어다.
첫 주에 이런 결심을 하고 나니, 시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찾고 11월을 꽤 평탄하게 보낼 수 있었다. 사실 보통의 일상과 이벤트들에서 아주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받은 한 달이었다. 이렇게 단순할 수 있나 싶지만, 퇴사 이후 사람이 정말 단순해졌음을 문득문득 느낀다. 감정은 천연색만큼이나 명쾌한 희로애락 넷만 존재하는 것 같고, 그 사이사이 헷갈리고 혼란스러웠던 회색지대는 눈에 띠지도 않는다.
몇 개의 역할을 수행하고 타인과 관계 맺기를 하던 1년 전까지의 나와 달리 최소한의 역할과 자발적으로 선택한 관계 맺기만 해도 되는 지금의 나는 방향성은 달라도 여전히 이런저런 고민을 하지만, 고민하는 것 자체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들이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것에 안달복달할 일이 없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더욱이 이제 나 혼자만의 문제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잘 돼도 안 돼도 나 밖에 상관이 없으니 신경을 끊고자 마음먹으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잘라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끊어냄으로써 결정을 빨리 내리는 것도 있고,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도 있고, 무작정 미루는 것인 경우도 있다. 솔직히 개중에는 이런 식으로 미뤄두었다가 이제 와서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었다며 위로를 할 밖에.
내가 조금은 안타깝고, 조금은 원망스럽고, 그보다 꽤나 애정하여 사고의 편향성이 생길지언정 계속해서 거리 두기와 객관화를 시도한다. 그러다 보면, 가끔 사소한 것부터 나를 객관화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고민에 대한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남의 얘기를 들으며 판단하는 편이 더 나은 것과 같은 이치인 것 같다. 그리도 안 되던 것이, 사무실이고 집이고 낮이고 밤이고 놓지 못해 꿈에서는 상상까지 결합해 나타나던 것이 말이다. 나의 예민함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건 좀 억울하다. 하지만 지금은 신기하게도 자연스러웠다.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시점에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내가 잠시 길을 잃었다는 듯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지니고 있는 자가 이 시대의 지성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 물론, 실제 그런 사람 많다.
첨예한 감수성으로 세상이 불편하고,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이가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했다. 아, 물론, 실제 그런 사람 많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럴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매 순간 그럴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속세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중학생인지 고등학생 때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동생으로부터 필부필부야,라는 말을 듣고 상처로 남은 기억이 있다. 평범한 보통의 사람을 거부하고 싶던, 조금은 남다름을 인정받고 싶던 그런 청소년 시절이었다. 아마 성인이 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평범하지만 나에게 숨겨진 작은 보석 같은 특별함을 찾고 싶은.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평범함은 평범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그냥 평범함이 아니라는 것을, 그 평범함이 너무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단순한 상태로, 단순함을 추구하면서
마지못해 하는 스트레칭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고 허리 찜질도 수시로 하면서 몸을 살폈고,
해 좋은 주말에 식구들과의 서울 근교 나들이로 가을을 흠뻑 보고, 느끼고, 걷고, 배고프고, 음식을 따뜻하고 배불리 먹으며 가족과의 유대감을 느꼈고,
지금은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는 전 동료들과의 찐한 대화를 통해 타인과의 연대감을 느꼈고,
봄부터 만나고 싶었던 분을 만나 소소한 안부와 음식을 나누며 친밀감을 느꼈고,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전 직장을 방문해 개인적으로 따로 만나지 못했으나 보고 싶었던 동료들과 친근한 수다 타임으로 환대를 받았고,
꾸준한 드라마와 예능을 즐기는 것은 물론 지난달 보다 책을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흥미롭게 읽으면서 정신을 살폈다.
이렇게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시간을 보내면서 무엇보다 나의 정서적 안전을 느꼈다. 스스로 챙겨 먹어야 하는 것과 귀찮은데 또 열심히 많이 먹는 나를 재차 확인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썩 훌륭했다. 그나저나 열량 제한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평생 식습관과 식사량에 스트레스를 받는 심보는 무얼까. 오히려 음식에 대한 스트레스는 더 커졌다.
그리고 내친김에 멀리 사는 친구를 방문하는 여행을 결정해 버렸다. 서프라이즈 한 이벤트이면서 또한 사고이기도 한 이 결정은 꽉 채워가는 백수 1년 차(이럴 때는 백수라 칭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나름 자가 자극요법)라는 현실로 인해 망설임은 길었지만, 친구랑 얘기하고 날짜를 확정하고 항공편을 예약하기까지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필수 절차를 밟는 2-3일의 시간이 지난 뒤,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심상 '망설임'이라는 단계를 배치해 두었지만, 결국은 이미 갈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양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들 이렇게 인격을 분리하면서 생각보다 논리적이고 자기 앞의 현실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상적인 자아 하나쯤은 키우지 않을까 싶다. 최종 결정과 행동은 이상을 따르는 일이 많지 않아도 말이다.
출발하기까지 3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결심을 하고 준비를 하면서 이런 식으로 떠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게 올 해의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어김없이 이런 식으로 날짜를 잡았기 때문에 계절은 비수기였고, 예측할 수 없는 우기였고, 늦게 뜨고 일찍 지는 해가 짧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런 식으로 날짜를 잡았기 때문에 친구도 본인의 코 앞 일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고, 가족과 직장의 시간을 계획할 수 있었고, 그래서 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지내면서 보니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는 날씨 면에서도 세상 럭키한 기간이 아닐 수 없었다. 운이 좋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운 안에 있다.
무엇보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20대와 가족과 함께 하는 40대의 친구를 길게, 가까이에서 다시 만나고, 새롭게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친구와 함께 나도 20대이면서 동시에 40대인 친구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머잖아 순 40대로 돌아가는 카운트다운 시작 예정). 나의 무모한 방문을 허락해 준 친구의 가족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달의 목표는 없다. 있었는데, 없어졌다. 아마도 내년으로 밀리게 될 것 같다. 내년에는 생활의 방식과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매달 목표를 세우고 지켜보고자 노력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연간 목표 몇 개쯤은 지니고 살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