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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Sep 20. 2024

아직은 휴가중입니다

마지막 퇴근을 하고 휴가가 이어졌다. 

사용하지 못한 휴가에 업무 마무리와 인수인계를 하면서 생긴 휴가까지 더해져 퇴사 전 소진해야 하는 날이 꽤 됐는데, 퇴사 유예 기간 아니면 백수 적응기라 할 만했다. 

동료들의 하루하루가 궁금하지만 다시 참견할 일이 없고, 

휴가가 끝난 후 다시 출근할 일이 없다는 것이 이전의 휴가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 전, 마지막 출근을 앞두고는 점심 약속이 이어졌었다. 

한동안 참치김밥으로 대부분의 점심을 해결하던 나에게는 이것만으로도 큰 이벤트이다.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 일정 거리를 벗어난다는 것이 퍽이나 달라진 시간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팀 동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또는 혼자 사무실 구석방에 앉아 유튜브를 보며 김밥을 먹을 날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했다. 


사무실을 떠난 이후로도 한동안 점심과 저녁 약속이 계속되었다. 참 신기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저녁 약속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아무리 연말 특수라도 이렇게 일정이 많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사는 건가 싶었다. 덕분에 매일 아침 출근하던 내가 갈 곳이 없다는 변화를 무리 없이 체화할 수 있었다. 가장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심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년에 걸친 기간 코로나 한 번 걸리지 않았던 내가 많은 외출에 피곤해서 감기에 걸렸다. 사실 코로나로 대혼란을 겪는 기간 중, 최초 확진을 넘어 재확진자와 재재확진자가 발생하는 중에도 가끔 억울했다. 나는 왜 그 흔한 코로나 한 번을 안 걸리나... 남들처럼 병가로 집에서 쉬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물론 앓은 사람들은 두 번은 못할 짓이라고 했지만. 그게 맞는 것도 같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그렇게 갑자기 인기인이라도 된 냥 꽉 찬 연말을 즐기면서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그리고 베를린으로 떠났다. 몇 년 동안 방문하지 못했던 베를린의 공기를 수혈해야 했고, 베를린 땅에 서는 자체가 목적이었던 만큼 특별한 계획이 없는 여행이었다. 


무엇을 해야 한다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이 시점에 마음먹은 유일한 것은 하루하루 내가 한 일 기록하기였다. 어느 순간 기억과 기록 속에서 사라진 나의 시간이 아쉬웠기 때문이고, 다시는 내 시간을 잃어버리기 싫었다. 특별하지 않아도 타임라인별로 무엇을 했는지 적고, 좋아하는 작은 수첩에 좋아하는 샤프로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매일 밤 책상이나 침대에 앉아 일기를 적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오일풀링(dm에서 발견한 오일풀링제를 구입해 여행기간 동안 매일)을 하고, 숙소 앞 길 건너 좋아하는 카페로 커피를 사러 간다. 가끔은 옆옆 건물에 있는 카페로 가서 커피 맛에 변주를 준다. 오늘은 외출을 할지 말지, 한다면 무얼 할지 또는 어디를 갈지, 오늘은 어디서 뭘 먹을지를 빈둥대며 생각한다. 외출을 할 때는 어플로 날씨와 함께 풍속도 체크해 유럽의 겨울을 대비한다. 하루의 중간중간 내 시간을 기록하고, 밤이면 어느 때보다 열심히 토너와 에센스와 크림을 챙겨 바른 후 일기를 쓴다. 

그곳에 갔으니 가고 싶었던 곳에 가고, 보고 싶었던 사람을 보고, 먹고 싶었던 것을 먹기도 했지만,  

그곳까지 가서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가져간 책을 뒤적거리며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다. 창 밖의 빛으로 겨울의 짧고 낮은 해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도 만족스러운 일이다. 

무엇을 해도 조바심이 나지 않았고, 아깝지 않았고, 아쉽지 않았다. 


그 시간의 베를린 여행기


2023년의 마지막 까만 밤, 

연극인으로서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자유인으로서의 한 시대를 맞이했다. 

타지였고, 혼자였고, 약간 쓸쓸했고, 많이 홀가분했다. 

이유는 있으나 근거는 없는 만족감에 벅차올랐다.

한국인들은 심장으로 전달되는 보신각 종을 울렸을 시간에

유럽인들은 화려하고 시끄러운 폭죽을 쏘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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