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삶은 비워지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비워졌다.
한 달 전 동네 가락공판장 오포점에 과일을 사러 늦은 시간 방문했다. 가락공판장은 24시간 영업한다. 야행성 주부인 내게는 매우 편리하다.
입구에 들어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나는 6년 전 이곳 가락공판장에서 판촉사원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과일코너로 이동하는데 옆쪽으로 나이 지긋한 여사님께서 집채만 한 여행가방 두 개를 세워 놓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편과 해외여행을 오래 다녀오던 길."
"세워 두웠던 자동차가 방전이 되었다."
"집이 바로 근처인데 도움이 필요하다."
이곳 오포 신현리는 도로계획을 고려하지 않은 난개발로 유명하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곳이 많고, 심지어 택시도 진입을 꺼리는 구불구불 산동네라 "음주운전이 필수인 동네"라는 멍청한 소리까지 나올 지경이다.
그녀의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거부 의사를 밝힌다. 당연히 꺼려질 수 있다. 나는 과일을 고르며 내내 그녀가 신경 쓰인다. 계산을 마치는 시간까지도 그녀는 도움을 받지 못한 거 같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좀 모셔다 드릴까요?"
도움을 드려도 되냐는 내 질문에 그녀가 크게 놀라며 택시도 잡히지 않아 난감했다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나와 아들과 여사님이 뒷좌석에 옹기종기 타고, 그녀의 남편은 앞자리로 모셔 남편이 바래다 드렸다. 차로는 7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나 늦은 밤 눈까지 내려 구불구불 산동네는 젊은 나도 무거운 짐과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싶다.
목적지 도달 후 우리 부부에게 수차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주시는 노부부 께서 아들의 이름을 묻기에 대답해 드리니 아들을 위해 꼭 기도하겠다며 그녀가 주머니를 뒤적 거린다.
"내가 해외에서 와서 현금이 하나도 없어요."
"이거라도 받아줘요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요."
손사래를 치는 나를 밀치고 그녀가 차 안으로 지폐 두장을 던지다시피 놓고 간다.
과일 덕후인 나는 가락공판장에 일주일 두세 번은 방문한다. 과일과 채소가 신선하다. 야채 팀장님이 새벽마다 큰 시장에 가서 공수해 온다. 나는 그분이 사 오는 과일은 믿고 구매한다.
오늘 들어온 딸기와 귤이 참 좋다. 딸기 세팩과, 귤 두 박스를 구매 후 주차장에서 매일유업 사장님을 마주쳤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정말 오랜만이세요"
"엇! 문희 씨. 아들 많이 컸네? 몇 살이에요?"
"이제 다섯 살이요. 죽겠어요."
"나는 다 키웠어요. 고등학교 졸업 시켰거든요."
부럽다며 물개박수 치는 내게 사장님이 유통기한이 임박했는데 먹는 데는 문제없다며 900ml 우유 다섯 팩, 대용량 요거트 한팩을 꺼내 주신다. 나도 다급히 시장바구니에서 딸기 한팩을 꺼내 안 받겠다는 사장님 트럭에 딸기 한팩을 집어던지다시피 넣어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유 다섯 팩 이라니 너무 많다. 마트 주차장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바로 앞에 '와플대학'이 눈에 보인다. 아싸 드디어 갚을 기회가 생겼다. 아들 손을 잡고 덩실덩실 달려갔다.
"사장님! 저 우유 나눔 하러 왔어요. 그리고 가락에 딸기가 참 좋던데요?"
그녀에게 우유 세팩과, 딸기 한팩을 드리고 왔다.
첫 와플대학을 방문했을 때 아들 아이스크림을 하나 시켰는데, 아이스커피 1잔과 와플이 덤으로 나왔다.
"문희 님 이 시죠? 저 문희 님 팬이에요. 들어올 때 한눈에 알아봤어요. 너무 반가워요."
그녀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눈에 생기가 있고, 웃는 입매가 맑고 목소리가 좋다. 사람의 '인상'에 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일 먼저 맑게 웃는 입매와, 분명하지만 부드러움을 품고 있는 목소리가 옵션으로 따라온다.
참새가 방앗간 지나치랴, 근처 골프장에 커피 얻어먹으러 쫑쫑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실장님이 환한 얼굴로 반겨준다.
"문희 왔어? 마침 잘 왔어. 아들 주려고 과자 사놓았는데 딱 맞춰 왔네?"
"정말요? 난 귤 나누러 왔는데...! 그럼 딸기도 한팩 더 받으세요."
동네를 한 바퀴 휙 돌고 집에 오니, 내게 귤 한 박스가 남아있다. 생각해 보니 아들 몫의 딸기가 남아있질 않다. 푸파하하하 웃음이 나온다. 다시 또 마트에 간다. 청정원 여사님이 "너는 또 시장 보러 왔냐."며 행사하고 남은 사은품인 작은 어간장 세 개를 장바구니에 넣어주고 퇴근한다.
연초에 교통사고를 내었다. 차 번호판 근처에 눈에 보이는 긁힘이 생겼다. 젊은 차주에게 정말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사과드리며 수리가 필요하시면 연락 달라고 연락처를 드리고 왔는데 저녁에 차주에게 보상은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감사한 마음에 커피와, 치킨 쿠폰을 따로 보내드렸다.
나는 사주, 명리학은 배워본 적 없어서 잘 모르지만 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사람은 10년을 주기로 운기가 크게 바뀐다. 그리고 대운이 들어오기 전 교운기 라고해서 운이 바뀌는 시기에 특징이 있다.
- 이사를 하게 된다.
- 내 의지와 관계없이 주변 관계가 틀어진다.
- 고립된다.
- 고난, 역경, 소송, 교통사고, 구설수, 권고사직 등
- 잘 되던 일이 꼬인다.
나는 주기적으로 6개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나눔 하거나 정리한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것은 삶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채워지면 비워진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힘들지만 삶이 늘 그랬다. 삼재인 시기에는 작게 행동하고 작게 움직인다. 크게 활동하고 크게 움직이면 그만큼 운이 크게 나빠질 확률이 크다.
요즘 내 일과에 아래사항은 꼭 지켜낸다.
1. 양치 후 아침 공복에 호박즙을 마시기
2. 첫 끼니는 신선한 야채나 과일, 단백질로 구성된 식단
3. 헬스장에서 운동
4. 책을 읽고 글을 쓴다
5. 아들을 하원한다
6. 아들과 논다
7. 매일 청소 및 침구류 먼지를 제거한다.
나는 요즘 교운기 인가 싶을 정도로 안 좋은 일이 연속적으로 생겼다. 이를 두고 친구는 나에게 '문희에게 경종을 울리는 일들은 절망이 아닌 희망인 것'이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작가인 내 친구는 루틴을 철저하게 지킨다. 문희야, 일상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작은 힘은 큰 일에서도 널 지킬 수 있는 힘을 내어 줄 거야.
친구 덕분에 다른 일은 몰라도 내가 반드시 지키는 일이 있다. 싱크대 수채통을 반짝반짝 빛나게 유지한다. 다른 사람들은 들여다볼 일이 없다. 나만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내 마음도 환하게 빛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끼마다 깨끗하게 닦아 놓는다.
나는 이 과정 속에서 내 삶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