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날의 안부 - Ep.03
설원에 들어서면 갑자기 스피커 음량을 줄인 듯 고요해진다. 발밑에서 눈이 눌리는 소리, 숨이 목도리 안쪽에서 부딪히는 소리만 남는다. 그 고요함에 취해 나는 한참이나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드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원천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슬플 것도 아플 것도 없었다. 광대한 고독은 애초에 내가 이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싸워서 이겨내려 할수록 오히려 더 넓어지고, 견디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 설원은 내게 그 사실을 딱 한 번에 납득시켰다.
그날 나는 인적 없는 길을 홀로 걸었다. 길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아무 표식도 없었지만, 눈 위에는 내 발자국이 생기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발자국의 모서리가 조금 흐려지고, 또 한 번 지나가면 내가 남겼던 흔적이 나를 닮지 않게 변했다. 이 세계는 내 흔적을 오래 내버려 두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남겨둔 것이 지워지는 세계라면 붙잡아야 할 이유도 덜해지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홀로 걷는 동안 그 사람과 보낸 아주 사소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같이 걷던 속도, 말이 끊겼을 때의 침묵, 고개를 살짝 돌려 주던 습관 같이 특별할 것 없는 장면들이 프레임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이런 쓸쓸함 속에서도 괜히 웃음이 났다. 황량함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그래도 마음 한쪽이 덜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내 속의 눈은 녹지 않는다. 다만, 때를 기다리며 눈을 감는다. 어떤 마음은 급하게 녹이면 흙탕물이 되고, 억지로 녹이려 하면 더 단단해진다. 그래서 나는 내 안의 눈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위로 내려앉는 것들을 기다렸다. 눈은 닿는 자리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갖는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면 금세 검은빛을 먹고, 모락모락 노천탕 위에 떨어지면 순식간에 따뜻한 물이 된다. 같은 눈이지만, 머무는 곳이 달라지면 의미가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눈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을 때다. 메마른 가지가 하얀 꽃을 받아들여 잠깐 다른 존재가 된다. 눈꽃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비어 있던 곳에 잠깐 생기는 결정체다.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당신이라는 눈이 내게로 와서 눈꽃이 되길 바란다고. 누군가의 온기가 내 고독을 없애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 황량한 면 위에 아주 작은 무늬 하나라도 얹어주길 바란다고.
당신의 눈꽃은 시들지 않는다. 그저, 바람에 옮겨갈 뿐이다. 이리저리 흩날리던 눈꽃씨가 내 눈밭에 살며시 내려앉는 날, 나는 비로소 눈을 뜬다. 그때 새로 시작되는 건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고독은 여전히 광대하겠지만, 그것은 작은 나무 하나가 되고, 시간이 지나 숲이 된다. 그렇게 그곳은 결국 당신의 설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