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회사에 소속된 '전업 기자' 생활을 끝내고 '전업맘'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 편집국장과 데스크를 만나는 일이었다. '이제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통보해야 하는 걸까, '저 그만두는데 마음 편히 보내주세요'라고 허락을 구해야 할까, 아니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 걸까. 무엇이 됐든 나의 '경력 전환'을 공식 선포하기 위해 거쳐야 할 통과의례였다. 모든 일에는 끝과 시작, 시작과 끝이 있으니까.
"애들 학원 돌려!"
발걸음이 무거웠다.
일 년 만에 들른 회사는 익숙했지만 낯설었다. 아니, 불편했다. 육아휴직 후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곳에 퇴사를 고하러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내 육아휴직을 걸고 부장과 '모종의 거래'도 있었다.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랬기에 더더욱 복직의 의무감이 나를 짓눌렀다. 껄끄럽지만 감당해야 할 시간이었다.
국장과 마주 앉았다. 가방 속에는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애가 아직 완전치 않아요. 지금은 제가 아이를 키우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
흐음, 일 가르쳐서 할 만하면 그만 두니... 회사로선 보통 손해가 아니야.
그렇지, 국장에게 시급한 일은 쓸만한 인력을 붙들어 앉히는 것일 테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 방법이 없나? 애는 학원을 돌려. 유치원 끝나고 태권도 보내고 피아노 학원도 좀 보내고. 우리 애들 보니까 아내도 그렇게 하더라고.
아, 학원. 사람들이 말하는 복직의 방법이 결국 학원이었을까. 예상치도 못한 말에 입이 굳게 닫혔다.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애들 다 그렇게 큰다.
이미 수없이 들어온 말. 애들은 다 그래. 시간 지나면 좋아져. 그런데 내 아이는 그렇지 않더라.
그래, 알았다. 아이를 얼마나 대단하게 키우려고. 니 애는 복 받았다.
수년 전 일. 국장과 오간 대화가 100% 있는 그대로일 리 없다. 사람의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어서 자신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된 느낌과 버무려져 그게 '사실'인 것처럼 자리하게 된다고 했다. 세월을 지나 계속 곱씹으면서 왜곡된 의미가 점점 더 강해져 기억 속 '팩트'가 된다고. 하지만 내 기억에 남아있는 대화는 이랬다. 뉘앙스는, 행간에 숨겨진 의미는 이랬다. 도대체, 애를 키우면 얼마나 잘 키우겠다고. 약속도 저버리고 이제 그만둔다고 하나. 기껏 가르쳐 놨더니.
수많은 고뇌 속 주인공은 결국 '나'
내 주변에는 또래보다 '형님'뻘 엄마들이 많았다. 강남 8학군에서 최선을 다해 자녀를 키워 대학 보내고 군대 보내고 취업시키고 결혼까지 빈틈없이 완결한 이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안정적인 중산층 가정들. 허나 속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들로 마음고생 한 번 안 한 경우가 없었다.
아이 사춘기 때 관계가 틀어진 지인은 성인이 된 아이와 여전히 불편한 사이라 힘들어했고, 불미스럽게 '학교 폭력'에 휘말려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감행한 가정도 있었다. 수천만 원을 쏟아 아이들을 최고 명문대에 보냈지만 결국 남은 건 남보다 못한 부부 사이라는 이들, 삼수 끝에도 대학을 정하지 못한 딸, 원하는 회사에 취업하지 못한 아들만 보면 속이 타들어간다는 이들. 나보다 앞서 인생의 경로를 밟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제 때 자녀와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이들은 두고두고 관계 회복에 어려움을 호소했다. 자녀 양육의 '적기'를 놓쳐버리면 '애프터서비스(A/S)'에 무한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문제는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A/S' 결과를 장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허덕거리는데 사춘기 때 문제가 더 커진 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큰아이는 만으로 다섯 살. 분리불안과 야경증으로 힘들어해 온 시간도 5년이라는 뜻이었다. 누군가 그랬다. 상처를 어루만지고 회복하는데 2배의 시간이 걸린다고. 그렇다면 10년. 아이 열다섯 살이면 사춘기의 정점, 북한도 무서워서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중 2'를 지날 때였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아이들 옆에 제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회사를 돌고 돌아 각 부서의 데스크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쉬움, 응원, 격려... 하지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인생 과제를 해 내느라 긴장했던지 등줄기에 땀이 흘렀던 기억만 남는다. 인사 담당 직원에게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끝.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엄청난 프로젝트를 수행한 기분이었다. 당분간 이쪽에 올 일은 없겠군. 인생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은 불과 몇 분만에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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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내 인생 가장 잘한 일
수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엄마 바짓가랑이 붙잡고 눈물 콧물 쏟던 큰아이는 중학생이 됐다. 밥을 씹지 않고 입에만 물고 있던 둘째는 야구선수처럼 덩치가 커졌다. 이후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지금, 여기, 아이들은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퇴사'를 결정한 나를 두고 누군가 이리 말할 수도 있겠다. 결국 워킹맘이 힘들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할 능력이 없어서 도망간 거 아니냐고. 맞다. 그럴 수도 있다. 둘 다 잘하는 '슈퍼우먼'이 될 재간이 내겐 없었다. 선택해야 했다.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일과 육아 다 잘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위태롭게 붙잡으면 나와 아이들, 우리 가정에 상처와 아픔만 남을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당장, 여기서 먼저 해야 할 일. 그게 나에겐 '육아'였다.
세상에선 '슈퍼우먼'이 되라고 했다. 다들 그렇게 정신없이 사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가 아팠다. 난 그저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모이를 찾아다니는 닭처럼 살고 있었다. 비로소 고개를 들어보니 무엇이 먼저인지 눈에 들어왔다.
워킹맘은 모두 일을 그만두고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일하면서도 충분히 아이를 건강하게 잘 키울 능력과 여건이 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내 인품은 박약했고 삶을 통제할 능력은 미천했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끝도 없이 기대할 상황도 못 됐다. 세상 완벽한 '이모님'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내 상황에선 주변 조언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애들은 다 그렇게 힘들어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다 그렇게 크는 거라고. 그렇지. 그렇겠지. 다만 내 아들은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따랐다가 내 아이의 상황이 악화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땅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땐 사람들이 내게 뭐라 조언할까.
결국 선택은 내 몫이다. 내 아이와 우리 가정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건 나 자신뿐이다. 내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결정하지 않아서 비난을 받을지언정 그게 무서워 다른 이들의 말을 따를 순 없는 일이었다.
많은 워킹맘들이 여전히 일과 육아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누가 도와주면 일도 포기하지 않고 아이도 잘 키울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 힘들어하면서, 때로 분노하면서도 매일 버티고 견디고 힘내서 살고 있을 거다.
너무나 힘겨웠던 결정을 내리고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니, 세상 많은 사람들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삶의 공식은 없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좌우되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컸던 나였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그것을 내려놓았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음소거'로 바꾸고 오직 나 자신과 가정에 집중했다. 남편 월급만으로 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건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그건 그 다음 문제였다. 어떤 선택이든 꽃길만 있는 건 아니니까. 가시밭길을 없앨 순 없지만 지혜롭게 이겨낼 순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