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의 낭만? vs 예측가능한 계획?
MBTI에서는 판단형(J)인지 인식형(P)인지 구분하는 지표가 있다. 본질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처한 환경에 따라 성향이 바뀌기도 한다. 최근에 난 ENTJ와 INTJ 사이를 기분에 따라 오가는 정도다. 지표 상 판단형(J)이면 계획성 성격에 가깝지만, 실제 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 외에는 즉흥적으로 검색하고 찾아가기 바쁘다. 신혼여행 또한, 오로라나 에펠탑 같은 보고싶은 장면만 논하며 유럽이라는 큰 지도만 보고 떠났고, 매일 숙소와 이동경로를 즉흥적으로 찾아 다녔다. 지나고 보면 좌충우돌했던 경험이 낭만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사실 다음 일정을 확인하느라 낭비하는 시간이 많았고 사소한 다툼도 생기곤 했다. 그때는 무계획의 낭만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예측 가능한 즐거움 이야말로 삶의 안정된 리듬 속에서 피어나는 또 다른 낭만이 될 수 있다.
어떤 계획수립을 결심하였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Reference를 확보하는 것이다. 여행지처럼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 정작 나에게 맞는 정보를 찾기 어렵기도 하고, 반대로 정보가 부족해 계획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기술사처럼 주변 정보나 합격 수기가 많은 경우에는 Reference를 참고하여 자신만의 학습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지만, 나 같이 늦깎이 대학원을 도전하는 경우 비슷한 Reference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 비해 처한 환경도 특별했고, 원서 접수나 자료 준비까지 학교 관계자에게만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마치 지도 없는 즉흥 여행처럼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우연히 찾은 길로 나아가며 목적지에 다가가야만 했다.
내 경우에는 직장생활을 하며 뒤늦게 대학원에 도전한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한창 업무량이 많고 업무 효율이 높을 30대 후반에 2년간 휴직을 하는 것 또한 큰 부담이었다. 마냥 부정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의 누군가가 마냥 잘되기만을 바라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매사가 조심스러웠다. 특히, Reference를 얻고자 찾아뵌 사내 옛 유학 경험 선배들에게는 격려와 함께 “그 정도 무계획으로는 입학조차 어려울 것 같다”는 피드백을 여러 번 들었으니 사내에서는 항상 언행에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원서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몇 가지 고민해야 할 상황들이 있었다. 먼저 당시에는 2000년 7월말로 COVID-19가 창궐하여, 국내보다 먼저 미국을 한창 휩쓸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1학기부터 학교 셧다운 소식이 들려오자 굳이 휴직을 하고 오프라인으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부터 생겼다. 또한, 대학원 과정에서 석사 논문을 쓸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대학원을 다니면 당연히 논문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응시한 학교의 대학원 코스는 논문 과정와 비논문 과정으로 나뉘어 있었다. 학교 관계자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고 어떤 과정을 추천하는지 질의하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Are you going to do a Ph.D?" 라고 물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박사 과정을 염두에 두고 기업체 연구직이나 교수직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커리어를 목표로 한다면 석사 논문과정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반면, 현 직장에서의 커리어 향상이나 이직을 고려한다면 비논문과정을 추천한다고 조언하였다. 사실 박사라는 명칭이 주는 권위와 무게감이 크지만 커리어 전환이나 병행은 엄두조차 낼 수 없어, 주저없이 비논문 과정을 선택했다. 그래서, 굳이 Lab을 구할 이유가 없어지다 보니, 당시 미국에서 하루 수십만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던 상황에서 굳이 현지에 갈 이유가 없어서 온라인 수업으로 학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격리 상황 중 Lab에서 어떻게 실험을 진행하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논문과정을 택한 경우 사전에 연구를 희망하는 교수나 Lab에 컨택하여 승인을 받아야 했고, 비논문 과정의 경우 담당교수가 자동으로 지정되었다. 수업방식도 학기별 온라인/오프라인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전환은 신학기 시작 전 별도 신청만 하면 가능하여, 굳이 실제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부담이 거의 없었다. (결국 학교를 한 번도 안 가긴 했지만…) 단, 비논문 과정은 논문 과정보다 이수해야 할 전공 학점이 30점으로 1.5배 많았고, 세부 학점 기준이 있어 원치 않는 과목도 들어야 했기에 졸업이 녹록지만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COVID의 영향인지 원래 그런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나 같은 직장인 대학원생들은 대부분 온라인으로 미국 전역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코드는 달랐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수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첫 학기 이후에는 완치 소견서 증빙 후 강의실 출입이 허용되었지만, 한 동안은 강의실 내 학생이 열명도 채 되지 않았다. 어김없이 학기 첫 수업 때마다 교수님들은 지역별 접속현황을 언급하곤 했는데, 한국에서 접속하는 유일한 학생이 있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비논문 과정으로 새벽에 녹화된 강의를 다음날 저녁에 보는 식으로 수업을 쫓아가다 보니, 업무와 학업을 병행하는 일정이 어느덧 습관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 덕분에 2년간 학기중에는 가족과 외출할 기회조차 없었지만, 급여를 받으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소정의 장학금으로 학비 부담을 줄일 수 있었던 덕분에 최소한의 비용을 마칠 수 있었다. 대학원 1년 후에는 학교가 다시 개방되어 오프라인 전환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이미 습관처럼 학습하다 보니 굳이 가족과 떨어져 학교에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학원의 기계공학 전공 수업의 경우 일부 역학과목의 경우 수 계산 위주의 숙제나 Mini test, 중간/기말고사 형식으로 적응하기 익숙한 편이었고, 그 외에는 논문 형식으로 주제 선정 후 자료 조사, 기존 논문 분석 등 프로젝트 과제를 작성하는 과정이 대부분으로, ChatGPT가 없던 당시 Google 번역기가 없었더라면 무사히 마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커리어 향상을 위해 해외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는 경우 나처럼 즉흥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좀 더 계획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현지 체류 시 테슬라 같은 기업의 인턴십 신청 기회도 있었고, 졸업생 모임 등 현지 네트워크 형성 같은 장점이 있지만, COVID-19 상황으로 인해 좋지 않은 체류 여건에서는 직장이 학교 인근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미서부나 동부가 대부분이라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과정이 훨씬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대학원 졸업장을 받은 지도 3년이 지났다. 큰 변화를 꿈꾸었지만, 삶은 의외로 조용히 흘러간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서 나는 확실히 달라져 있다고 생각한다. ‘학위’라는 결과물보다, 그 과정에서 길러진 끈기와 습관이 나를 앞으로도 이끌어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갈무리하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정리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