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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Jul 11. 2021

나를 지워 버리는 나

해리성 기억상실증

두 번째 희귀 난치 질환인 CRPS(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 선고받은 후에 가장 먼저 내가 보인 반응은

진짜로? 또 나한테 불치병이?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꿈은 아니겠지? 오진 일지도 몰라!  실제론 아프지 않은데 내가 아픈 척을 하는 건 아닐까? 내가 그저 조금 피곤해서 게으름을 피우며 아프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훌훌 털고 일어나 '잘 쉬었다' 말하면 모든 상황이 다 끝날수 있지 않을까?

이었고 수도 없이 많은 날과 많은 밤을 이런 생각들로 지새웠었다.

그리고 점점 심해져 가는 여러 가지 증상과 동반되는 합병증, 여러 가지 다른 병들,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무자비한 통증을 겪으며 짧은 시간 안에  나 자신이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순수한 분노로 가득 휩싸 버렸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는 잘 들어주었지만 내 얘기는 남에게 털어놓기 힘들어했던 난 갑상선 질환을 앓았을 때도, 목 디스와 척추관 협착증을 앓게 됐을 때도, 첫 번째 희귀 난치 질환의 발병 사실을 알았을 때도, 두통으로 인한 심한 구토를 1년 반이 넘게 하며 죽을 고비를 넘길 때도, 심장 부정맥 시술을 할 때도, 불면증으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더라도 , 심한 우울증으로 베란다 난간에 몇 번을 올라섰을 때도, 그래 그럴 수 있겠거니 살다 보면 아플 때도 있으려니 힘들 때도 있으려니 하며 누구에게도 구체적으로 내가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지 말하지 않고 그냥 견디고 버텨냈다.

주변의 가족과 지인들은 그런 나를 보면서도 그저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 정도쯤이야. 날 몰라? 잘 견디고 있어. 그건 그렇고 너는 어떤데?"


라는 나의 말에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에 바빴다.


그들의 눈에 나는 정말 괜찮아 보였을까?




어깨의 회전근개가 파열이 되고 그에 따른 수술이 이어진 후 그 수술의 후유증으로 내게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라는 지옥이 찾아왔다.

광목천으로 (사주단자 넣는 함에 들어있던 하얀 기저귀 천) 내 몸을 한번 감아 양쪽으로 길게 빼서 양쪽 끝을 힘 좋은 장정 10명씩이 붙들고 줄다리기하는 것처럼 잡아당기는 듯한 통증이었습니다.. 그러면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부서져 깨지고 그 조각에 내장 하나하나가 찢겨 피가 차오르고  회 뜨는 칼로 사방으로 난도질당한 피부가 가차 없이 찢기는 무지막지한 고통이었습니다. 소리를 지르다 못해 이를 갈고, 악물었고 마침내는 이가 깨져 금이 갑니다. 버티다 못한 잇몸이
녹아내리기도 했습니다, 오함마로 뼈를 쾅쾅 부수어 2-3번씩 양쪽으로 돌려가며 뼈가루까지 짓이겨 바수어 버리는 참혹한 통증입니다. 그 바수어진 몸안에 불이 붙어 온 몸이 '활활 '타오릅니다. 끔찍하고 몸서리 쳐지는 고통이고 원초적인 아픔입니다. 짐승같이 울 때도 많습니다.


처음부터 런 통증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약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는 팔의 통증에 짜증스럽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섰고 수술 후에도 지속되는 통증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다. 하지만 그 당황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고 점차 심해지는 통증은 순식간에 사람 변하게 만들었다.

통증이 없는 순간은 없다. 그 보다 더한 통증이 생기는 순간이 찾아올 뿐이었다.




내가 기대고 싶었던 순간에 내 얘기를 온전히 귀에 담는 사람은 많았지만 내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주 보던 가족들도 심지어 함께 사는 남편도.

가족들은 각자의 생활이 있다는 핑계로 날 보러 오는 걸 두려워했고 한 번이라도 내게 통증이 온 것을 본 가족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그 시간을 함께 견디는 걸 힘겨워했다.

남편조차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통증이 극심한 순간에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방 밖에서 서성거리며 딸이 부탁하는 것들을 가져다주는 등 사소한 심부름만 할 정도로 나는 홀로 괴물 같은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내 옆엔 오로지 엄마를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이제 막 성인이 된 딸과 10년의 기다림 끝에 집으로 데려다 기른 강아지 아들 콩이뿐이었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분노가 끓어 올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평생을 남을 먼저 생각하며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다. 양보하고 나누는 것은 당연한 미덕이며 내가 조금 힘들어도 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나누다 보면 어느샌가 내  위로받는다고 여기고 살았었다.


하지만 다 소용없었다.


정작 내가 죽을 만큼 힘들 때 어느 누구도 내게 힘을 주지 못했었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보고 있어도 믿어지지 않는 참혹한 고통에 어느 때부터인가 뭉텅뭉텅 지나간 시간들에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을 선고받은 초기 2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억지로 기억을 짜내려 하면 심한 두통이 따라오고 기억이라고 해봐야 사진 몇 장처럼 어떤 장면, 장면이 생각날 뿐이고 그 이후에도 큰 이벤트가 있던 앞, 뒤 전후의 기억들은 대부분 사진 몇 장과  같은 장면의 기억 외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한 가지 신기한 건 내가 글을 써야겠다 작정하고 그 장면에 대한 얘기를 딸과 나눈 후 글을 쓰면 내가 그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있는 느낌으로 기억이 복기된다는 것이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지금도 여전히 나는 전 달의 기억을 잃고 어제의 기억을 잃는다. (다행히 예전처럼 모든 걸 다 잊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나 스스로가 고통스러운 나를 지워 버린 것이든 아니면 의식하지 못한 나의 의도적인 노력이 됐든 나를 지워버린 나를 통해 난 다시 견디고 이겨낸다.




*해리성 기억 상실증

(dissociative amnesia)

뇌의 이상 없이 심리적 원인에서 발생하는 기억상실증으로, 개인에게 중요한 과거 경험과 정보를 갑자기 회상하지 못하는 장애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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