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억울함'에 대해 살펴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더 어렵고, 더 불안정하고, 더 혁신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할 일이 많았다. 그들은 사회에 꼭 필요한 일들을 하고 가치를 만들어내는데, 정작 그들의 삶 자체는 더 어려워지는 걸 많이 보았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며,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는데 그들의 삶이 더 좋아지기는 커녕 세월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현실적인 생존의 문제를 고민해야만 했다. 사회에겐 좋은 영향을 주지만 그들의 가족에겐 굉장히 험난하고 '삶의 여정'로 느껴지는 삶을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되었다.
특히 내가 대학시절부터 존경했던 한 활동가 형은 불모지였던 전남의 고향에 내려가 그 곳에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뼈를 갈며 일했다. 초,중,고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토론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구축하고, 그와 함께한 많은 활동가들과 5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 그 생태계의 기틀을 잡아나가며 살아갔다. 그런데 그 형은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아이들과 함께할 교육과 강의를 준비하느라 밤샘 PT준비를 하다가 부정맥으로 갑작스레 가족들의 품을 떠났다. 형에게는 함께하던 형수님과 3살배기 딸이 있었다. 형수님은 서울에서 형을 따라 연고도 없는 전남으로 이주해 온 것이고, 새로운 터전에서 터를 잡던 중이었다. 그의 죽음은 그 지역사회 활동가들, 학생들, 선생님들, 서울에서 나와같이 영향을 주고 받았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슬픔이었지만, 굉장히 많은 선한 영향력의 씨앗들을 뿌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추모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형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에게는 그리 많은 것을 남기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는 존경받는 이로 사회의 선한 씨앗들을 많이 남겨지만,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삶이 그리 쉽지 않은 길이 남겨져 있었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굉장히 큰 충격이었고, 나는 내가 생각했던 길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삶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가치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남겨진 '삶의 여정'이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나는 그의 삶이 개인의 노력의 기준으로 사회적인 영향력으로 보았을 때, 굉장히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어느 조직에 속해있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를 치뤄 높은 자리의 기관장이 아닌 이유로 그는 경제적 가치를 매기는 등급표에서는 최저등급을 받아야만 했다. 깊게 찾아보니, 기재부에 나와있는 지급기준표에 따라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공공기관에서는 그 기준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의 실력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아닌 그가 가진 증명과 입증에 도구로 구조적 불합리함과 부조리가 합리화되었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가치 평가는 이뤄지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앞이 글에서 소개한 김기원 교수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모순을 설명하는 단어로 '억울함'을 꼽았다.
그는 우리가 겪는 경제적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억울함’이란 1차 분배과정의 문제로서, 시장의 불공평한 분배에 대한 억울함이 사람들을 열 받게 만드는 것이다. 재벌 거대기업이 단가를 후려치고 기술을 탈취하는 등 중소기업을 억압하는 불공정한 시장 탓에, 재벌은 비대해지는 데 반해 중소기업은 버티기조차 힘들다. 기업 사이의 이런 억울함과 더불어 노동자 사이에도 억울함이 존재한다. 공공부문 및 대기업의 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및 비정규직) 사이에 능력과 무관한 부당한 격차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 셈이다. “
능력과는 부관하게 부당한 격차가 자리잡고 있어,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시장 분배되는 억울함이 있다. 이것은 대기업vs중소기업, 공공부문 및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vs 중소기업 노동자(및 비정규직 노동자), 공공부문 및 대기업 직장인 vs 자영업자 사이에도 발생한다. 굉장히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억울함이 발생한다. 개인들이 창출하는 사회적 가치와 무관하게 경제적 가치의 배분은 어느 조직에 속했는지, 얼마나 운이 좋은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 격차에 대한 합리적인 기준이 작동하지 않는다.
위의 '억울함'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노동과정에서 생긴 결과물을 나누는데 있어서, 시장에 의해 1차분배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시장의 불공평한 분배로 인해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어느 조직, 어느 기업에 속하느냐 자신의 고용형태가 무엇인가에 따라 그 분배받는 결과물의 격차는 크게 벌어진다.나는 이것을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 일어난 일들로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나의 본가 지역에는 대기업 자동차 제조 공장이 있다. 그 대기업 제조공장에는 자동차를 제조하는 라인이 있으며, 그 라인에는 그 대기업의 소속인 A와 그 기업의 사내하청 업체를 다니는 B와 외주하청 업체는 다니는 C가 함께 근무한다. 그 라인 안에서 하는 일은 대동소이하다. 오히려 외부하청 업체가 조금 더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A,B,C가 받는 임금의 차이는 연단위로 각각 A>B>C 순으로 많게는 2000~3000만원씩 차이가 발생한다. 함께 그 기업의 사내하청을 다녔더라도 누구는 대기업의 정규직이 되고, 누구는 사내하청의 비정규직으로 소속이 되는데, 그들이 하는 일에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임금차이는 연차가 쌓일수록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 A,B,C는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더이상 서로 만나지 않는다. 동일한 일을 하지만 살아가는 삶의 질은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자신이 받는 복지혜택, 가족이 받는 혜택 그리고 미래에 쌓이는 혜택 등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함께 학교를 나온 동창들은 더이상 친구가 아닌 이 구조적인 계급에서 서로가 다른 계급으로 인식한다. 이 차이는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님에도 서로를 향한 질투와 분노 그리고 억울함이 깔려있다.
김기원 교수가 말하는 억울함은 위의 사례처럼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며, 이를 직접 경험하거나 간접 경험하는 이들은 억울함을 느낀다. 하지만 스스로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억울하면 니가 열심히 노력해서 너가 정규직이 되면 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개인의 노력 차원에 이야기로 치부할 뿐, 루저(?)로 취급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공감하고 이것이 공동의 문제라고 인식되는 경우는 굉장히 희박하다. 또 구조적 문제로 이해해도 개인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로 치환하여 이 문제를 극복해내기도 어려워 좌절하기도 한다.
김기원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걸 개인이 느낄 수 있기까지 개혁되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구조개혁을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이 많고, 그 노력을 통해 바꿔나가려고 하지만 개혁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이 시민에게 부여되지 않아서 더디고 쉽지 않다. 그렇지만 자신을 갈아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했던 그가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과 제도를 한 번 생각해 본다.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 누구나 사회적 부를 창출하는데 기여했으니 그 부를 나누어서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가 낸 세금과 예산을 우리 원하는 방향으로 설정하여 집행할 수 있는 법을 만들 수 있는 제도다. 기본소득과 국민발안제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가치 창출과 관계없이 기본적인 생활을 가능하도록 기본소득을 제공하고, 우리의 원하는 방향성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일정 수 이상(스위스 같은 경우는 전체인구의 5만명이상)서명을 받은 법안을 직접 발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는 국민발안제를 통해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방향성을 직접 결정하는 것이다. 국민투표를 통해서 그 법안이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지를 시민들이 함께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이들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구조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개인의 차원에서 고민해 나가고 있다.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경제적 가치의 차이를 극복하고 그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나만의 성'을 만들기로 생각했다. 핵심은 나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쾌적한 집을 한 채 가지면서도, 장기적으로 그 집의 가치가 시간이 감에 따라 상승하면서 자산으로 경제적 가치가 발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점점 경제적 가치가 상승하면서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나만의 성'으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주택으로 부동산으로 지속적인 이익을 얻기보단, 내가 살기좋은 집을 하나 마련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사회적인 억울함을 '나만의 성'을 가지면서 해결되고, 그 억울함의 격차는 줄이고, 이와 무관하게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에 조금 더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시장의 평가와 상관없이 스스로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일은 경제적인 여건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을 만드는 것이다. '나만의 성'을 통해 나를 지키고, 그 환경 속에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 간다.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과 접근을 쪼개어 만들어 가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시장의 평가와 상관없이 내가 가치있다고 하는 일을 하며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