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화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맨 채 플랫폼에 서서 고개를 떨구고 구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구둣발로 바닥을 앞뒤로 왔다 갔다 긁어대며 한숨을 푹 내뱉었다.
“너도 참 질기다. 고생했어.”
창화가 바닥을 긁고 있는 구두를 애처롭다는 듯이 내려보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먼발치에서 기차 들어오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더니, 이내 창화의 구두코 앞에 멈췄다. 창화는 제 기차가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기차 지붕 쪽으로 잠시 눈길을 주더니 느릿느릿 힘없는 걸음으로 기차에 올랐다.
창화는 평소 습관대로 통로 쪽 자리를 예매했다. 비행기를 타든 기차를 타든 내릴 때 불편함이 적은 통로 쪽 자리를 택하는 편이었다. 매고 있던 검은색 크로스 백을 선반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 앉아 핸드폰에 있는 기차표를 바라보았다.
‘부산’
창화는 목적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물속으로 잠수를 하듯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저기…요.”
왼쪽 어깨 위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오자, 창화는 마치 숨이 턱까지 차올라 막 수면 위로 올라온 잠수부처럼 화들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어디까지 가세요?”
곱슬머리에 눈이 커서 쌍커풀이 진한, 처음 본 여자가 창화에게 목적지를 묻고 있었다.
“네?”
“죄송한데, 어느 역에서 내리시냐고요…”
“아, 네. 저, 저… 부산역이요.”
“아, 저는 삼랑진역에서 내리는데 괜찮으시면 안쪽으로 들어가 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먼저 내리는데…. 주무시거나 하면 귀찮게 해드릴 것 같아서요.”
“아, 네. 네.”
갑작스러운 여자의 제안에 창화는 마치 좌석을 잘못 찾아 앉은 사람처럼 엉덩이를 떼어 창가 쪽 자리로 옮겼다.
“감사합니다.”
여자는 창화에게 작은 감사를 표하고 창화가 앉아있던 통로 쪽 자리에 앉았다.
창화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종점까지 가는데 구석에 처박혀 창밖 풍경이나 보며 잡생각이라도 덜 하고 싶은 것이다. 창화는 오로지 창밖만 넋 놓고 바라보았고 여자는 매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그리고는 머리끈을 입술로 문 채, 어깨 아래로 풀어져 있던 긴 곱슬머리를 모아 질끈 묶고는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차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며 서울역의 풍경을 지우고, 새로운 풍경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내 풍경도 달라지겠지.’
창화는 몸을 창 쪽으로 더 바싹 기댔다.
창화는 집에 돌아왔지만, 누구를 만나러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집에는 오랜만에 긴 휴가를 받아 2주를 쉰다고 일단 둘러댔고, 혼자 방에서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는 게 전부였다. 가끔 경식이 전화를 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창화는 바쁜 척 핑계를 대며 경식과 오래 얘기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야… 최경식, 너 한창 바쁜 시간 아니냐?”
“야 인마. 이 냉정한 자식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화 좀 해. 아니면 문자라도.”
“내가 너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뭘.”
“그래서, 지금 어디야? 부산이야?”
“그렇지 뭐… 내가 갈 데가 있나.”
“내가 한번 내려가야 널 보겠지. 넌 절대 서울로 올라오진 않을 거 같고… 아 참, 그리고 말인데. 내가 너 회사 복귀…”
“경식아, 나 전화 들어온다. 또 통화하자.”
창화는 경식이 회사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핑계를 대고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게 창화가 그와의 긴 통화를 꺼리는 이유였다. 창화는 오늘도 집 근처 도서관으로 피신을 떠났다. 휴가라고는 했지만 사실 휴가가 아니기에 집에 있으면 괜스레 부모님의 눈치가 보이고 죄송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창화는 마시던 커피도 다 떨어졌고 덩달아 해도 떨어질 시간이 되어가자,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걸었다.
‘밀양 얼음골 사과’
창화는 한 과일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밀양이라는 단어와 사과를 보자, 얼마 전 기차에서 받았던 사과가 떠올랐고, 사과보다 더 달달했던 대화도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사장님, 밀양 사과가 이 얼음골 사과예요?”
“그럼요! 밀양 얼음골 사과 몰라요? 사과하면, 밀양 얼음골 사과죠!”
“아… 밀양 사과가 유명한 거였구나…”
창화는 긴 다리를 접어 쪼그려 앉아 밀양 얼음골 사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냥 밀양 사과가 아니라 얼음골, 이 얼음골 사과가 특히 맛있죠. 밀양에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어서. 피서지로 유명한 얼음골이라는 곳이 있어요.”
“한여름인데 얼음이 얼어요?”
창화는 덥수룩 한 머리를 쓸어올리며, 과일가게 사장님을 올려다보았다.
“얼음골 안 가보셨군요? 곧 여름인데 꼭 한번 가 보세요. 한여름에도 진짜 시원하고 너무 좋아요. 어떻게… 사과 좀 담아드릴까요? 엄청 달아요.”
창화는 요즘 밀양이라는 동네 얘기를 부쩍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았다. 살면서 몰라도 되는 곳 일지, 몰라야 하는 곳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듣게 되고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사과 열 개만 담아 주세요.”
창화는 한 손에‘밀양 얼음골 사과’가 든 봉지를, 한 손에는 사과 하나를 베어 물며 걸었다.
“돌멩이 말고 이런 거도 좀 얘기해 주지…”
창화는 얼마 전 기차에서 그녀가 해줬던 표충사와 만어사 얘기를 떠올리며 혼자 구시렁거렸다. 그리고는 사과에 난 한 입 자국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 연락처라도 알아둘 걸 그랬나…’
창화의 아쉬움은 딱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그녀에게서 느낀 이 감정은 단순히 한 여자에게 끌리는 감정도 아니요, 그렇다고 친한 친구같이 느끼는 감정도 아니었다. 정말, 마치 아까 과일가게 주인이 얘기한 밀양 얼음골처럼 한여름이지만 얼음이 어는 느낌. 딱 그런 느낌이 밀려오며 창화는 얼마 전 타고 내려왔단 기차에 다시 오르고 있었다.
제11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최종심 선정작
소설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2024년 12월 10일 출간
작가 인스타: @author.ot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