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가 감추어 온 마음의 목소리
의지를 잃은 자의 절규를, 당신은 들어 본 적 있는가.
절망을 담은 자의 눈은 차갑게 얼어붙어 그 깊이 없는 공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모래 위에 성을 쌓은 어리석은 자는 무너져가는 자신의 집을 보며 쓰디쓴 울분을 삼킨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루를 시작하는 소녀. 그건 분명, 현실을 애써 외면한 결과였다.
남을 원망한다는 감정조차 알지 못했기에, 선생도 부모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을 탓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른들은 배역을 주었다.
'의젓한 딸'
그 배역은 가면극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치료사 선생님들과의 관계는 늘 일상을 나누는 정도에 머물렀다. 오늘 밥은 무얼 먹었는지, 기분은 어떤지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 그 이상 선을 넘지 않았다. 서로를 위한 선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와의 말다툼은 잦아졌다. 사춘기가 찾아온 것일까 잠시 생각했지만, 싸움의 주제가 언제나 운동 관련이었으니 그건 아니었을 터였다. 늘 죄송하다고 먼저 사과하는 건 나였다. 딱히 뉘우치는 마음은 없었으나, 버림받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한 감상이 싹튼 것은 장애 관련 뉴스와 사례를 너무 많이 접한 탓이리라. 물론 어머니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 멀쩡했던 자식이 장애를 갖게 되자 병원에 버렸다는 사례가 흔치는 않으나,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누가 알려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어른들의 대화를 주워들었던 것 같다. 역시 애들 앞에서는 입조심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나를 보고 어른들은 '의젓하다'며 칭찬했다. 어릴 때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해 그저 좋다고 웃어넘겼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나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던 것이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듯 보였지만, 자신만의 견고한 선을 만들어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다.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채 광활한 바다에 잠식되어 가라앉고 있던 나는, 스스로 걸어 들어간 바다이니 쉽게 나올 수 있을 거라 어리석게도 믿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미움받기 싫어서, 나 자신을 기꺼이 죽여버린 나에게 애도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장례식도 부고장을 보내야 조문객이 오지 않던가. '말을 해야 알지'라는 세상의 쉬운 질문 앞에서 해일에 휘말린 나는 질식할 듯 가슴이 조여왔다. 심해로 가라앉는 정신은 더 이상 숨 쉴 구멍을 찾을 수 없이 목소리는 이미 심연에 잠겨버렸다. 어쩌면 이 모든 비극의 전제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눈이 멀어 갈 곳 잃은 원망이 최종적으로 고른 도착지는 나였을 뿐이었다.
나에 대한 증오는 검은 촉수처럼 뻗어 나와 온몸을 휘감았다. 그 촉수는 목을 조이고, 심장을 쥐어뜯고, 결국 나를 집어삼키는 독이 되었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원망하며, 마침내 나를 이 독으로 죽이고 싶었다.
가족의 웃음을 지운 나, 어머니의 눈물을 부른 나, 할머니의 한숨을 늘린 나,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른 나.
나는 그 모든 원인이라 생각되는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너 때문에 엄마랑 아빠가 이혼을 못 하는 거야.'
'엄마 아빠가 너 돌봐야 해서 이렇게 떨어져 지내야 하는데…'
'더 열심히 해서 나을 생각을 해야지.'
'너 계속 그러면 버리고 간다.'
'엄마가 힘들어서 그래.'
어른들이 무심히 던진 말들이 좀비 바이러스처럼 쉬이 퍼져 내 삶을 덮쳐왔다. 해일 때문에 버거워진 정신은 점점 아득한 심해로 가라앉았다. 더 이상 숨 쉴 구멍조차 찾을 수 없는데.
상처의 근원은 나인가, 어른인가. 그 질문조차 무의미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고통만이 사실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몇 명의 자아를 가두었던가.
꿈을 포기하고 돈을 위해서, 사랑을 포기하고 우정을 위해서, 나의 아픔을 포기하고 남의 아픔을 위해서.
나를 가두어두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 풀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잠시 이별을 하는 것이지, 버린 것이 아니니까.
절망으로 열쇠를 잃어버려도 괜찮다. 언젠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테니.
이젠 그 열쇠가 녹슬어 형체조차 알 수 없고, 나를 가두었던 감옥의 문은 닫혀버려 언제부터 갇혀 있었는지도 희미해진 채,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스스로 가둔 또 다른 나야. 미안해, 지금의 나는 너를 당장 구해줄 힘이 없어.
오랜 기간이 걸리겠지만 그곳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가끔 잊어버릴 수도 있어.
하지만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너에게 갈 거야. 너를 영원히 버리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시간이 걸리겠지만 곧 찾을 거라는, 그 믿음 하나로 살아간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