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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Feb 25. 2018

엄마의 탄생

내 인생의 시즌 3. (      )하는 인간이기 전에, 여성.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나는 움찔했다. “지금은 그냥 놀고 있어요.” 이런 말은 의도치 않게 ‘주부노동’과 ‘엄마노동’을 폄하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몰랐다. 의식적으로 조심하자고 생각했건만 “무심결에 진심을 드러내는” 그런 말 한마디가 또 불쑥 튀어나왔다.


물론, 나는 내 돌봄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주말과 휴가랄 게 없이 24시간 풀가동되는 내 재생산 노동이 정작 노동의 주체를 위한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아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남편은 내 노동이 창출한 가치를 말로나마 인정해주므로 주부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데 특별한 외적 갈등이랄 게 없다. 매달 생활비를 받을 때 느끼는 그 미묘한 굴욕감과 자신을 위해 돈을 쓸 때 느끼는 죄책감만 통제할 수 있다면야, 뭐. 그렇다면 놀고 있다는 말이 드러내는 내 진심은 무엇일까.


‘주부’와 ‘엄마’는 내 인생의 시즌 3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일 뿐이다. 지금의 나를 설명해주지만 내 정체성의 근간은 아닐 뿐더러 존재의 가치를 그 역할에 둔 적이 없다. 주어졌으니 최선을 다한다, 그 정도. 

집안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엄마가 된 후 나라는 인간의 바닥을 보았고 덕분에 조금은 성장했으며 상상하기 힘든 종류의 행복을 맛보았으니 감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나는 (  )하는 인간”의 괄호 속에 그 두 역할을 넣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 딸, 며느리 등의 역할을 넣을 생각이 없듯이. 그래서였다. 내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으면, 내 할 바를 하지 않고 빈둥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봄노동을 하느라 하루를 꽉 채운 날에도, 여전히 그런 기분이 드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내 존재의 사명을 다하지 않는 데서 오는 초조함, 좌절, 무력감. 준비하는 일들이 엎어지고 또 엎어질 때마다 자괴감을 느꼈고, 자신감을 잃은 몇 년 전부터는 주변에서 “그래 요즘은 뭘 하고 있어?” 물어볼 때면 ‘그냥 논다’고 대답해왔다.


이런 사연이 생략된 채 건네지는 ‘논다’는 말은 얼마나 위험한지...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어떤 편견을 심화시킬 수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 <82년생 김지영>에서 ‘맘충’이라는 충격적인 단어를 접한 뒤에야 적극적으로 입단속에 나섰다. 

그런데도 이 모양이다. 엄마와 주부라는 자각 부족, 그로 인해 그 말들이 지닌 가치와 의미의 성찰 태만.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지난해 날 경악하게 했던 말들이 있다. ‘맘충’과 ‘자궁청소’. 단지 내가 이런 언어폭력의 직격탄을 맞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모성’ 자체에 대해 크게 관심 없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에서 불거지는 ‘엄마 논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제3자처럼 관망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    )하는 인간이기 전에, 여성이므로.


“인간의 삶이란 자신이 속한 특정 제도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이다. 한 개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가 수행해온 그리고 현재 수행하는 역할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이러한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한 제도에 대한 이해를 선행해야 한다.” - C. 라이트 밀스, “사회학적 상상력”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현재 사회정치적 위치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으며, 라이트 밀스의 말처럼, 여성이 속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살피지 않고서 여성 개개인의 삶을 제대로 통찰할 수 없다. 내가 수행하는 역할들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내 인생의 시즌 3를 지금과는 다르게 풀어나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그러므로 일단 공부를. 그리고 그런 공부는 여럿이 함께. 

그리하여 읽기 시작했다. <엄마의 탄생>.

 


<엄마의 탄생>은 그간 내가 딱히 관심 두지 않았던 ‘모성’ 이데올로기를 고민해보게 했다는 점에서 유용했고, 몇몇 챕터는 발췌본을 만들어 주위에 뿌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몹시 복잡한 심경이 들게 한 책이기도 했다. 


내용이 어렵다거나 (많은 기혼여성들이 전반적으로 동의할 것 같았기에) 논쟁적인 책은 아니다. 독서 끝에 다다른 결론 또한 명쾌했다. 모성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도 아니며, 시대마다 다르게 사회정치적으로 키워진다는 것. 사회정치적으로 모성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여 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장치로서 작용하지 않도록 담론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사적인 영역에서의 모성을 개별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 우리는 각기 다른 모성을 주체적으로 선택, 실현할 수 있으며, 모성의 실현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그렇게 마음이 불편했을까.


당시 내 불만은 이런 것이었다.  

엄마들이 ‘불안’과 ‘욕망’을 못이겨 주체성도 의지도 없이 끌려다니는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엄마들의 불안과 욕망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일반화시켰다...고 투덜댔다. “난 아닌데, 내 주위만 봐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많은데.” 그러다가 내 이런 태도가 여자들이 성차별과 성폭력을 이야기할 때 남자들이 많이들 보이는 태도와 흡사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는 태도는 문제의 본질을 주시하지 못한 채 그 문제를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옮겨가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켜 버리는 위험이 있다. (그에 대한 은유작가의 통찰력 있는 컬럼이 채널예스에 실려 있다.)

혹 나도 그와 비슷하게 반응한 건 아닌지, 내 감정에 가로막혀 논점을 놓친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자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때 내가 느낀 불쾌함의 정체는, 누군가가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 내가 분석·판단되어 몇 개의 어휘로 결론 내려지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이것도 일종의 (여성으로 살면서 갖게 된) 피해의식이 아니었을까. 모성에 대한 책이니 (현 사회와 더불어) 엄마들이 분석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데도, 대상화된다는 것 자체가 마뜩치 않았던 건 아닐까. 유난히 여성에 대한 (부정적) 라벨링이 많다 보니, 명명되는 행위 자체에 대한 피로도도 상당했다. 소비적 모성, 과학적 모성과 같은 별 거 아닌 용어조차도 그냥 넘기질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랬다...  


여성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생각이 아주, 아주 많아진다. 어쩌면 가장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질문은 정작 따로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이 감정을 갖는 게 맞는가. 내가 내는 목소리가 옳은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할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내 감정, 내 목소리에 확신하지 못하는 것. 내가 내는 목소리가 나만의 것인지, 아니면 내 안에 스며든 다른 누군가의 – 그게 부모이든 권위자이든 사회이든 간에- 이식된 목소리인지. 어쩌면, 나란 인간이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렇게 판단되는 것에 이토록 크게 반발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 콤플렉스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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