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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Oct 30. 2020

도시 탐험은 계속된다

에필로그

“What are you doing now?”

“I’m a explorer, urban reportage writer”


나는 도시를 탐험한다.

이제껏 만난 장소들과 앞으로 만날 장소들, 쌓아온 것들을 글과 드로잉으로 기록한다.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범주화에 머물지 않는 탐험의 자세를 기억하려고 한다. 어떤 장소에 익숙하다는 것은 이미 고정관념에 빠져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을 갖고 있는 사물과 생각들. 늘 너무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낯설거나 다르면 보이게 되고, 익숙하거나 비슷하면 보이지 않는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던져 버리고, 밀려나 있던 주제를 생각의 중심에 놓는다. 그렇게 차이를 드러내며 다름의 이유를 찾아 탐험을 한다.


장소에 새겨진 기록을 들여다보며 진화되어 온 시간과 흔적을 통해 유추하고 상상한다. 도시를 계속 확장해 나가며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내딛는다. 없던 것이 아닌 이미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늘 어떤 것의 이면은 바라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어떤 장소를 지나쳤을 뿐인데, 그 경험이 몸에 깊게 스며들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멀리 가더라도 잊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잔상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조금이라도 비슷한 구석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기억이 툭 튀어나온다.

연기 가득한 방에서 훈제된 소시지의 몸에 배어 떨쳐낼 수 없는 그 스모키함의 강렬함처럼, 물안개 자욱한 바닷가를 통과할 때 온몸에 축축이 스며드는 농밀한 습기처럼 장소에 대한 어떤 경험들은 몸에 흡수되어 빠져나가지 않고 오래도록 남는다. 그렇다. 장소에 대한 강렬한 경험은 한 번 우리 몸을 거쳐가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갑자기 찾아온 장소의 기억으로 인해, 그때 그 여행의 장소로 다시 우리를 소환하기도 한다. 한 번 경험한 장소가 바로 거기에서 끝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순간,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 재생되곤 한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장소를 만나고 경험하는 그 순간이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도시와 건축이 아닌 다른 종류의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자면  추리소설 속 장소들은 사건을 암시하는 단서와 가능성을 품고 있는 흥미로운 장르다. 밀실은 가장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배경이 되는데,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오리엔트 특급 살인, 나일강의 죽음, 구름 속의 죽음)에 기차와 배, 비행기라는 이동 수단의 장소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밀폐된 장소는 사건의 바운더리를 한정시켜 오히려 추리를 해나가는데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그렇게 추리소설은 장소이기 이전에 탈 것에 가까운 '곳'을 단번에 '장소'의 카테고리 안에 줄지어 늘어 세운다.

‘배’라는 장소, ‘비행기’라는 장소, ‘기차’라는 장소.

그리고는 밀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벌어지는지 그곳들을 장소로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트릭의 장치들은 구석구석에 숨어 손잡이, 창문, 서랍을 통해 탐정과 독자들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책을 읽어나가며 장소와 트릭의 장치들에 집중한다. 때로는 의외의 장르에서 힌트를 얻게 된다. 소설이나 에세이 중에도 장소가 유난히 잘 묘사된 작품들을 볼 때면 장소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잠재력이 많은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종류의 글과 드로잉 작업이 소설과 영화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배경으로 스윽 지나가도 무관할 만큼 이야기에 딱 맞는, 이야기를 품을 만큼 여백이 있는 장소를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으로 시점을 바꿔 바라보는 것이다.


광장과 광장 같은, 가장자리, 길과 갈래, 땅 아래와 동굴 안,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딘가, 모퉁이, 자투리 공간, 오래 비워진 공터, 쓸모를 따지기도 어려운 작은 턱, 건물과 건물 사이, 높은 곳과 낮은 곳 사이.


“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이 세계 안에 있다” _ Paul Eluard





Largo Do Dr. Pedro Vitorino, Porto, Portugal _ BGM # This Place Was A Shelter | Olafur Arnalds


바닥에 빗방울이 후드득...

아무도 없는 빈 장소에 소나기가 쏟아진다.

벽에 기대어 간신히 비를 피한다.


A (빈 풍경을 바라보며) 뭐라도 일어날 것 같은 날씨네.


B (뭔가 생각난 듯 살짝 웃으며) 이런 장소에, 이런 날씨.

왠지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아? 미스터리 한 살인 사건이나 쫓고 쫓기는 추격전 같은 장면.


A (갑자기 끼어들며) 오래된 문과 긴 담장이 추격신에 제격이겠네. 또... 담장 끝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이 될 수 있겠다.


B (눈을 반짝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괜찮겠네. 영화의 한 신이나 연극무대로도... 무대도 있고 말이야. 주변 건물들의 지붕과 종탑도 분위기를 완성하고. 배경이 있으니 이야기만 있으면 되겠다.


A (생각에 잠긴 듯)......


빗줄기가 더 거세지며 장소의 이미지가 흐릿해진다.



사람들을, 해프닝을 기다리는 수많은 장소들이 도시 구석구석에서 사건의 배경이 될 준비를 마친 지 한참이다. 미스터리를 암시하는 장소, 이야기의 소재를 제공하는 장소, 영화 속 장면을 위한 장소......


이제 다시 장소를 찾아 나설 타이밍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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