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넘어의 것

이곳에, 편지를 남겨둘테니 주소를 적어줘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by 호연지기


1.

갈대밭이 태양을 등지고 춤을 추듯 고개를 흔든다.

바람이 평원을 가로질러 불고 있는 거리를

우리는, 걷고 있었다. 손을 잡고 한 걸음.

여기에서는 푸른 바다와 깊은 하늘이 동시에

천천히 낙하하는 태양을 삼키는 모습을 훤하게 볼 수 있다.

절벽의 끝 지점. 종착점인지 출발점인지 모를 이곳에서

바닥에 앉은 채 석양을 바라본다.

참 예쁘다. 매번 경이롭고 놀라워. 너와 함께여서 일지도 모르지만.

하며 손을 옆으로 더듬지만 어느 누구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참 좋을때였지' 라고 되뇌었다.

알 수 없는 이곳. 절벽에서 한걸음의 발을 내딛어야 한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황홀한 태양의 섬광을 집어삼키는 저편의 지평선

달을 필두로 별들이 눈을 뜨며 펼쳐지는 지평선.

바람이 불지 않을때면 시간이 멈췄나. 차라리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다.

바람은 아무 목적 없이 부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알것만같다. 바람도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서.

바람은 나의 귓가에서 작은 소음을 만들며 지나갔다.

스치는 갈대가 폭포의 소리를 만들며

그림자는 푸른 평원의 파도를 만들어 일렁인다.

나는 녹색빛을 띄는 태평양 위를 걷는다.

바람은, 내 시선의 끝 저 지평선까지 날아가겠지.

그 끝없는 지평선 뒤에는 우리가 예쁜 집을 지어 살고 있을까.

그저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평선 너머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다.

에르빈 슈뢰딩거의 이론이 맞다면.

우리는, 우리가 꿈꾸었던 그 모습이겠지.



2.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스무살의 더운 여름날,

교대역 근처의 한 작은 카페에서였다.

나는 작업실에 박혀있는 시간 외에는 산책을 하거나 항상 가는 카페에 갔다.

작업실 밖으로 나와서 말보로 한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 하늘위로 번지는 담배연기를 따라 보이는

전봇대와 거미줄처럼 엉킨 서울의 전선들을 보며

전봇대 두개였나 세개를 지나면 나오는 거리에 있는 카페이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It Never Entered My Mind'

를 들으며 시작되는 빌에반스의 감미로운 피아노 터치에

서초동 온 골목이 재즈바로 변한듯 거리엔 모든 사람들이 기분좋게 취하고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타며

곡의 첫 번째 코러스가 끝날 즈음 카페에 도착한다.

이곳엔 말 많고 잔재주가 많은 사장님이 계신다.

좁은 카페지만 저녁에는 위스키도 팔고 다같이 떠들다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는 그런곳이다.

카페 사장님은 내가 말을 트고 얘기하며 대화를 나누던 유일한 사람이였다.

젊은 사장님이라 그럴까 대화가 잘 통했고

내가 이야기를 듣는걸 좋아해서 일지도 모르지만

끈질기게 이야기를 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불편했다가도 내게는 너무 안락한 곳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어찌 또 오늘도 곡 작업을 하고 연습하고 곡 쓰다가 머리 식힐 겸 사보 할 겸 나왔다고 내가 말 하니

나한테 카페 사장이 격하고도 차분하게 말했다.

"역시.. 천재들은 고독하고.. 그 일에 너무 진심이자 그게 인생인 것 같기도.. 아니! 음악이 그의 인생 그 자체 같아! 크으..!" 내게 엄지척을 올려주자

나도 웃으며 엄지를 치켜올려 받아주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로직으로 마스터링 작업을 끝내고 솔로 부분 7마디째 음이 씹히는 부분 체크도 하고 작곡한 곡을

오선지에 음표와 코드를 적는다. 그 곡의 이름은 -Heavy rain- 이였다.

오선지에 사보를 하며 음을 흥얼거리며 음표를 적던 나는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강력한 태양의 빛이 문의 손잡이에 굴절이 되며 나를 비추어

나는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나 싶더니 나의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카페의 자리가 좁은 건 어쩔 수 없으나

음표를 적으며 흥얼 거리기엔 살짝 민망한 거리인 만큼

그녀는 나의 집중력을 흐트려놓았다.

1마디의 악보를 그리려면 같은 음을 두어번은 들어야 겨우 사보 할수있을 만큼 말이다.

결국, 말보로 한대 태우며 바람을 쐬어본다.

다시, 본업 시작! 그러자마자 비참하게 말이다.

나도 모르게 휘파람으로 음을 내어버린 것이다.

너무 신경이 쓰인 나머지 눈치를 보려 고개를 살짝 들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듯 내게 눈인사를 하였다.

나는, 소위 말해 쪽팔려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

보고 싶어서 본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시선에 들어왔을 뿐인데

그녀는 책을 읽고선 노트에 문장을 적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러다 카페 사장님이 뜬금없이

"와우! 두 분들 지금 모습이 똑같은거 알아요?! 한 손으로는 적고 한 손으로는 보고 있는데 고개를 움직이는 타이밍까지 똑같아요 아! 대박 두 분 다 자주 오시는데 마주치는 일이 없었네~! 에헤이 여기 이 분은 천재 음악가 슈퍼 락스타 호연!!입니다! 이쪽은.."

그녀가 사장님의 말을 끊고선 말했다.

"아 저는 제가 할게요! 저는 선미입니다! 여기 근처에서 일하고 나름의 취미로 이곳에 자주 와요 반가워요 호연 씨!"

나는 부끄러운 느낌이랄까 골방에 썩어만 살고 음악과만 밤을 같이해서일까 여자에게는 참으로 서툴었다. "아, 네. 선미씨 반가워요! 성은 어떻게 되세요?"라고 내가 묻자

"아아 이선미 에요 그렇게 부르는게 편하시면 그렇게 불러도 좋아요."

"이선미.. 아니에요! 선미씨가 더 입에 붙으니 선미씨라 부를게요!"

"뭐야 얼굴 엄청 빨개졌어!"그녀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카페 사장이 일러 받치길

"호연씨는 부끄럼 많이 타서 막 그렇게 적극적이면 심장이 팡!! 하고 터져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니 천천히 알아가봐요! 저는 그럼 이만-!"

약간의 정적이 흐르자 내가 먼저

"아 저는 지금 할 일이 있어서요.. 이것 좀.."

"차근차근하세요! 저도 다시 집중해 봐야겠어요"

서로 살짝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서 그럴까.

이런 상황이 참 낯설고 부끄럽다.

보이지 않는 나 스스로를 가둔 울타리가 부숴진 기분이다.

낯설지 않은 기분.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부숴진 울타리--



3.

우리는 같은 날, 서로가 볼일을 마치고서 그 자리에서 가볍게 위스키를 한잔 했다.

서로가 짧게 자기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남을 약속하고는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한 달 전 내 안의 무언가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들이 새롭게만 느껴졌다. 내 발 밑에는

'일방통행'이라고 하얀 페인트가 서쪽으로 향하며 쓰여있는 그 글귀가 떨어지는 태양이 머리가 되어 글귀는 몸의 형태로 변하더니

선미의 모습을 하고, 이어폰을 통해 귀로 들어오는 백예린의 노래가 음표로 바뀌었다.

그 음표들이 춤을 추며 하늘에 엉키듯 꼬인

전봇대의 전선들이 오선지를 만들고 그 위에

온갖 음표들이 달라붙어 스코어 악보가 그려졌다.

내 마음 작은 울림들이 벽에 부딪히며 마하1의 속도로 거대한 울림이 되어 종을 치듯이 가슴 어딘가의 떨림이 울렸다.

심장의 소리이다 이것이 설레임이고 사랑이구나

아마 그럴테지.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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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다. 이게 뭘까. 어디선가 느껴본 감정이다.

번화한 곳으로 나는 걸었다.

이 많고도 많은 사람들 중 그저 지나쳤을 수 있을 그 사람들 중 그중에서도 하필 그 작은 카페 그 몇 안 되는 자리 중 내 앞에, 하물며 음악과 그림을 좋아한다. 검고 하얗고 빨간색을 좋아하며. 감수성이 풍부하며 야망이 있는 사람이고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홀릴듯한 외모. 이것은 나뿐만의 생각은 아닐 테지. 곱게 생긴 외모는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해도 되려나 라는 생각도 든다.

일주일에 한 번 우리는 아주 긴 하루들을 보내고

애석하게도 우리가 만나, 길고도 굵은 이야기들로 장식하는 일요일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다시 한번 시간이 또 지나고 지나며

가끔은 화요일, 금요일과 토요일에도 만났다.

만나온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것들이 참 많아졌다.

그럼에도 아직 알고싶은게 참 많았다.

매번 새로웠고 우린 정반대의 성향이지만 닮은 구석도 많았다.

콩깍지일까. 나는 선미를 사랑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선미도 나를 사랑했다.

우리는 사랑을 했다.

나는 더 없이 행복한 스무몇살 언저리였다.

아차, 그렇게 생각하니 뜬금없게도 그녀는

참 고양이처럼 곱게 생겼다는 생각이였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고양이처럼 다가와 내게 관심을 끌더니,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나에게서 마음을 훔쳤다.

이렇게 비유를 하는게 맞을까 싶지만

여하튼, 나의 이런 뜬금없는 생각과 번뜩이듯

말하는 헛소리들을 선미는 매번 배를잡고 웃으며

좋아했다.

이런 나의 허술하고 매력없는 말투에 좋아해줘서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사랑 한다는 감정에

부족한 지식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중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무엇이 되었든 이 감정은 사랑이 맞다 서투르지만

분명하게 사랑이다.

아, 나는 이런 마음을 책과 인터넷과 음악에서 보고, 배웠다 말하자

선미가 독학으로 배운것 치고는 꽤나 훌륭한 사랑의 방식이라며

어쩜 그렇게 바리에이션을 잘해서 나한테 써먹냐며

동네 어르신들도 여자라면 전부 홀라당 넘어올것이라며 웃었다.

생각할수록, 더 가까워질수록 선미는 멋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녀와 정반대의 사람 인데.

느리며, 무겁고 뜬금도 없는데 재미도 없고 비실거리는 그런 사람.

생각은 많은데 생각만 하고 하고싶은 일 마저도

그냥 나 혼자 즐기며, 자랑할 곳도 없어 그저 혼자서 만족하고.

그렇게 살았다. 나는 어려서 무지했고 바로 잡아줄 누구를 필요로 했지만 굳이 찾지 않았었다.

나의 일은 곧이곧대로 내가 고쳐댔으니 말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다 여전히 패션은 여름을 고수했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저녁에 겉옷을 입을 때였다.

아니, 겉옷을 항상 입고있었나. 하얀 색.

눈이 내린 날. 한 겨울. 한 해가 지났나. 이게 뭐지?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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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 해가 지났고 추위가 잦아들었을 무렵이다.

3월의 봄, 어느 일요일은 내게 긴히 할 말이 있다며 교대역 근처 지하의 '브롱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왜일까. 나는 무척이나 떨고있다. 한 해가 지난게 맞을까 이것이 몇년이 지났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스무살의 청춘으로부터 시작된 기억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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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간의 긴장을 하고서는 향한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나는 지은 죄가 없는데도 심판을 받는 기분이였다. 이 어두운 골목이 밝은 가로등으로 내 발이 향할수록 나는 으레 심장의 박동을 느낄수 있었다. 그렇게 가슴으로부터 머리와 손끝으로 전해지는 혈액의 순환이 느껴졌다.

브롱스 앞에 섰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검붉은 도화지에 흰 페인트가 엎질러진듯 말이다.

애당초 도화지는 왜 검고 붉은지

어째서 흰색의 페인트인지 그것이 왜 거기 있었는지.

..

"나 부모님이 이제 서울살이 그만하고 내려오래

사정이 있어서 독일로 이민 갈거래"

선미의 표정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떤 기분일것같아?"

슬프고 아쉽고 허망하고 허탈하고 공허하고 외롭고 고독하며 잔인하고 아주 살인적인 기분이라는 말보다 더 강렬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나는 물었다. 허나 그 물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답도 들었다. 똑같이 그 답을 기억하지 못한다.

깊은 동굴에서 벽을 천번이 넘게 부딪혀 돌아온 메아리처럼 들렸다. 모든것이 그렇게 들렸다. 선미의 모습마저 뒤틀리듯 엉켜 보인다.

눈에 보이는게 없어지듯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점차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 생각을 잡아야 해'

그녀가 떠난다. 떠난다. 떠난다. 떠난다.

나는 하얀 백지의 도화지 위에 서있다.

그 위로 비가 쏟아지듯 내렸다. 나, 우는것인가?

선미는 나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밀어댔다.

나 역시 그랬다.

다시, 나는 슬픈 비가 내리는 도화지 위에 서있다.

떨어지는 태양을 등지고 서있다. 안개를 품은 태양의 빛이 나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걸까."

"그때는 언제야?"

"그때가 언제지?"

기억은 여기서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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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어딘가 복잡한 사람이다. 아니, 복잡해졌다.

이민이라더니 독일이라더니 내 등을 쓸어주더니

두 주가 지나고 너는 뷔르뎀베르크의 어느 골목에서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아달라는듯이

자동차의 시동을 켜둔채 자살했다.

나는 멍하니 서초동의 뚫려있는 골목이라는 골목은 전부 돌았다.

내 속에는 모든것이 무너지고 잠겼다.

행복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쾌락과 고통, 고독과 연민.

그렇게 한달이 지났나. 무겁고 차가운 시간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틀만이 지났다.

생각이 너무 많아진 탓에 시간 이라는 방에 갇힌것만 같다.

왜일까. 나때문에? 가정사? 내가 그리워서? 나는 어쩌고. 너는 왜? 자동차? 번개탄? 퍽이나.

무너진 모든것들을 바로잡기 힘들었다.

하나의 기억만이라도 잡고싶었다.

잡아야 하는데. 잡아야 하는데. 잡아야 하는데.

기억이 끊겼다. 여기. 이곳. 매듭을 짓고.

나는 도화지 위에 서있다.

이 길목은 해가 떨어져 어두우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붉고 희게 빛이 나는 랜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 두 손은 어디론가의 외출을 위한 넥타이를 매며

나는 랜턴을 발로 걷어차 깨뜨렸다.

그러자 하얀 도화지 위로 내가 떨어져 폭사하여 붉게 도화지를 물들이고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어

피가 굳고 썩어 곰팡이가 슬어서 검고 붉게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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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몇년이나 더 지났을까. 10년. 20년. 모르겠다.

방황을 멈추지 못한채 본능과 욕망, 나태와 권태, 무능과 무지속에 살았다.

나는 그 사이 옆방의 작곡가를 만났다.

곡을 쓰되 이 사람의 무능함은 투명하게 보였다.

일반적인 코드진행에 쓰레기같은 운지법에

전형적이고 친절한 도미넌트 세븐에 토가나올것같았다.

뭐, 아무렴 좋지. 상관하지 않았다.

나의 욕정을 풀 욕망과 본능의 상대이기만 하면 아무렴이다.

그게 자유로운 선택지 라고 할 수 있으려나.

자유. 그게 무엇일까. 돈과 명예. 만능한 권력.

나는 그것들 사이에서 자유를 찾을 수 없음에

슬퍼졌다. 사람들은 성숙함을 요구한다.

나는 그 자물쇠에 맞게 체면까지 구겨가며 알맞는 열쇠의 모형으로 얼굴을 찌그러트렸다.

지겹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한 사람이 그립다.

선미는 '호라이즌' 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보이기와 다르게 곱상한 노래를 좋아하지 않고

밴드 'Bring Me The Horizon' 을 좋아했다.

공상과학도 좋아했다 매일을 떠들어댔으니.

너의 모든 세포와 정신이 원자의 형태로 돌아가고

만물의 모든것을 관장하며 흩어진 너의 원자중 하나가

사건의 지평선, 그곳에 너가 빠져들어갔다면

아마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있겠지.

나는 미쳐버려서 이런 망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가 없어

시간이 지난 나의 모습은 어떨지.

아니,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

어느 한곳에 머물러야 한다면 거기는 어디일지.

아니, 알고싶지 않아졌어. 내 시계를 건들지 마.

지금, 너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유레카-


7.

함께 걸었고, 함께 웃었고, 함께 꿈을 꾸었다.

선미는 내 앞에 있었다. 그때 그 모습으로.

"나 왔어, 조금 늦었나?" 내가 말을 했다.

격한 울분이 터져 화가 났다.

"그럴거면 독일은 왜 갔고 왜 그랬는지 알려줘."

선미가 나의 손을 낚아채듯 잡더니 말하길

"동쪽으로 걸어 해가 떨어지는 반대편으로."

나는 선미의 두 손을 잡았다. 꽉 잡고 슬퍼했다.

하늘에. 하늘에 별이 참으로 많다. 석양이 지는 이 하늘에.

참으로 별이 많다. 아름답고 경이롭다. 함에도

너는 떨어지는 눈이 부신 태양을 등지고 선 모습으로

내게 말을했다.

"그러다 눈 멀어. 동쪽의 달을 봐"

나는 뒤를 돌아 동쪽 위로 뜬 달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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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세상이 하얗다. 시선이 흐리다. 졸리고 피곤하다.

다리엔 힘이 없고 팔은 쥐가난듯 말을 듣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세상이 까맣고 다시 뜨려했더니

몹시 힘이 들었다.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들이 나의 주위를 둘러 쌓고 말을한다.

하나도 들리지 않고 기억도 뜸하여 나지 않는다.

세상이 하얗다. 저 하얀 종이에 지금 내 모습을 그리고싶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피곤하고 힘들다.

졸리다. 주변의 소리가 얼핏 들리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다시 시끄럽다. 기분 나쁜 꿈이다.

선미. 그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선미냐고 묻고싶었지만 입술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

온 몸이 마비가 되어 혓바닥의 느낌이 이상하다.

입을 열고싶다 말을 하고싶다 지금 이 쏟아지는

피곤함과 졸음을 이겨내고 잘 지내냐는 한마디 하고싶었다.

..."응!"...

---v^-v^-v^-v^-v^-v^-v^-v^----

눈을떴다. 세상이 하얗다. 여긴 어디인지 궁금하다

나는 천천히 눈알을 굴렸고 금세 사실을 알아챘다.

세상이 하얀게 아니라. 그냥 병원의 천장이구나.

무언가 움직일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고

힘겹게 부들거리는 입술로 숨을 내쉬고 한마디 뱉길

"씨발."


9.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한 해가 지나고서 나는 일기를 쓴다.

'나는 누군가의 흔적이자 파편이다. 조각을 맞출 퍼즐이자 증거이다.

살아 있어 고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살아 있다고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라는 법도 없다.

죽은자는 말이 없으니 죽은자의 산 증인이자

그이를 대변할 사신이다.

나는 그 상실의 목격자이자 산물이다.

너의 상실과 나의 상실은 연쇄적인 작용으로

살아있는 이들에게 잃어버린 모든것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진리를 관통할 지평선으로 향한다.

그것이 산자의 몫이다.'

지난 금요일 검게 물들인 복장으로 분당의 납골당을 찾아갔다.

격식이고 뭐고 나는 그런게 싫지만 그래도 꽃 한송이 들고 가고싶더라.

꽃은 뭘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이쁜거로 달라 하였다.

거베라 한 송이와 유칼리툽스를 너에게 올려놓고

너의 이름이 쓰여진 납골함을 보는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열한시인데

다음 약속시간은 네시 반이다. 거기까지는

한시간만 운전하면 도착 하는 거리이다.

나는 너와 세시간은 떠든듯하다. 모르겠다.

내가 혼자 "꽃 냄새가 좋다" 하니까

너가 "그러게" 라고 대답해서 이다.

오늘 날씨가 참 좋아 그래서 한 사람을 만나기로 했어

그런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왔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주에 90, 78시간을 일하잖아

지금 여기에 오지 않으면 또 언제 올까 싶었어.

근데 잘 온것같아 최근에 어머님한테 전화가 왔었거든.

여기 오기 2주전엔 어머님 아버님 모시고 식사를 대접했다.

직원이 나보고 아드님이라 하더라. 웃기지.

어머님 아버님은 웃으시며 부정하지 않으시더라

나는 당연하게 엄마, 아빠라 불렀다.

딸은 갔으니 아들 왔다고 한번씩 안아 드리고

아버님 담배에 불을 붙혀드리기도 했다.

너 때문에 다시 피운다 하시더라.

나는 건강이니 뭐니 하며 말리진 않았어.

그런데 마음은 좋지 않더라.

나중에 내 사업이 잘못되서 파산하여 갈곳조차 없을때

어머님이 날 아들로 삼겠다 하시더라.

최선을 다하여 산다는게 뭔지나 알아?

네 몫까지 내가 짊어졌다는 거야.

내가 살아서 너가 증명해야하는 모든것을

내가 감히 도전한다는거야.

그러니 나는 오늘도 너의 명복을 빈다.

너는 지켜만 봐.

우리 다시 저 세계의 지평선에서 만났을땐

석양이니 별이니 달이니 아무말 하지 말고

갈대밭 위 하늘 아래에서

비가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산책하자.

지구를 네바퀴 돌자. 그렇게 하자.

잘자거라.

이곳. 여기. 저곳. 저 어딘가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

수신자 '주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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