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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요 Jan 24. 2024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해 볼게요

진짜 쥐어뜯을 줄 몰랐지


내가 10년 동안 살았던 지방에선 집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두 개의 도서관이 있다. 아파트 정문에서 나와 왼쪽으로 나가면 '기적의 도서관'이 있고 오른쪽으로 나가면 '시립 도서관'이 있었다.


둘째 아이가 뱃속에 있고 첫째 아이 돌이 막 지난 즈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첫째 손을 잡고 둘째 아이는 애기띠로 업어 아파트를 나서면 동네 할머님들이

"하이고 아기가 아기를 낳았네" 라고 너도나도 한 마디씩 하셨다.


갈 곳 없고 아는 이 하나 없는 나의 지방살이에서 도서관은 참 고마운 존재였다.

약속 없어도 나갈 수 있는 곳,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책을 볼 수 있는 곳, 몇 시간을 눌러앉아도 눈치 주는 이 없는 곳,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꾸며진 공간, 모든 게 선물 같았다.

렇게 도서관을 자주 나갔던 덕에 아이들은 지금도 도서관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고

'도서관 가자'라  말하면 군 말없이 잘 따른다. 


인천으로 이사 오고 나서도 도서관을 찾았다. 여느 때처럼 도서관을 가다 평소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들어서 어디로 가야 하지 고민하는 찰나 눈앞에 떡하니 갈라진 갈림길이 나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아잇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너네가 빨리 생각해 봐" 핸드폰으로 지도 어플 키면 될 일이지만

장난치고 싶어 져 아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어디로 가야 하지?" 둘이 우왕좌왕 고민하는 폼이 귀여워 한번 더 채근했다.

"엄마는 정말 몰라. 너희가 어디로 갈지 결정해"

 

언제나 먼저 앞장서서 길을 찾던 엄마는 이제 아이들에게 길을 찾아 보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길을 잘못 들어서도 새로운 길을 알게 되는 것뿐이다. 길을 잘 찾으면 그것으로 다행이고, 설사 잘못된 길로 갔더라도 선택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재빠르게 돌아나가면 된다.


길을 잃어버려도 큰일이 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다. 훗날 인생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어버려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다시 돌아 나올 수 있길 바랐다.


그때 아들이 호기롭게 외친다.


"제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생각해 볼게요"


그게 골똘히 생각해 본다는 말인 줄 알았지



진짜 쥐어뜯을 줄 몰랐지.

갈림길에서 열심히 머리를 쥐어뜯는 너.


그 뒷모습을 보니 너무 웃겨 길 한복판에서 배꼽을 잡으며 웃다 이 장면을 놓칠 수가 없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참으로 내 아들답다. 그래, 앞으로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렇게 유쾌하게 헤쳐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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