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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원 Nov 02. 2024

노인을 위한 야구장은 없다

지금 하나씩 바꾸지 않는다면


두 개의 기억을 꺼내본다.


먼저 올해 봄 어느 날, 인천 문학경기장이었다. 우리 부부 옆자리엔 검은 양복 차림의 남성이 혼자 앉았다. 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서서 라인업송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남성은 차분히 앉아 맥주를 마셨다. 이내 시작된 우리 팀 공격. 유니폼을 맞춰 입은 팬들이 다 같이 응원가를 부를 때 그는 조용히 자리 앞에 놓인 커다란 배낭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곤 타석에 들어선 선수들의 유니폼을 하나씩 꺼냈다. 한두 명이 아닌 거의 모든 타자들의 유니폼이 그 안에서 나왔다. 타순에 맞춰 양손으로 힘차게 흔들었다.


이번엔 잠실, 여름이었다. 점점 뜨거워지는 프로야구 인기 탓에 남편과 연석 예매는 실패해 멀리 떨어져 앉았다. 오렌지석(응원석) 바로 옆인 레드석이었던 지라 나 포함 모든 팬들이 일어나 떠나가라 응원을 시작했다. 앞줄도 전부 일어났기에 앉아서는 경기가 잘 보이지 않았을 텐데도 내 옆의 남성은 계속 점잖게 앉아있었다. 안타가 나오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칠 뿐이었다. 경기에 집중하고, 박수를 치고, 다시 집중하고, 다시 박수를 쳤다. 6이닝쯤 됐을까. 일이 있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서 내게 "친구분 불러서 옆에서 같이 봐요"라고 했다. 중간에 과자 가져다주러 잠깐 남편이 들렀던 본 모양이다.


두 남성의 공통점은 하나.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였다.



프로야구 1000만 관중의 이면

티켓링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입장권 구매자는 20대와 30대가 총 64.4%를 차지했다. 롯데 구단 티켓 구매자의 중위연령은 무려 29세라고 한다. 


실제 올해 직관한 30번의 기억을 돌아보니 압도적으로 많이 보였던 건 내 또래 2030 팬들이었다. 응원에 열정적이고 유쾌하고 화끈한 젊은 층이 어느 블록에나 가장 많았다. 그들 덕분에 야구장은 더 뜨거웠고 신났다. 그런데 '어르신' 팬들은 어디로 간 걸까.


1년 전, 한 기사의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LG와 KT의 한국시리즈 경기 당일, 매표소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었다. 온라인 예매가 끝난 뒤 취소표를 현장에서 판매하는데, 취소표가 없거나 매우 적어 사실상 구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온라인 예매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야구장 출입문이 바늘구멍보다도 작은 셈이다. MBC청룡 때부터 응원했다는 LG팬은 결국 이날 경기를 보지 못했다.


1년 후, 올해 한국시리즈 기간에도 타사에서 비슷한 기사가 나왔다. 이번엔 해태타이거즈 시절부터 팬이라는 69세 KIA팬이 결국 표를 구하지 못해 헛걸음한 사례가 나왔다. 올해 프로야구 정규시즌 입장권을 온라인으로 구매한 사람 중 60대 이상은 1.4%에 불과했다고 한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예매를 해보려 며칠 동안 인터파크 앱과 씨름한 나도 겨우 딱 2경기 외야 표 한 장씩만 구했더랬다. 그땐 표를 쓸어가는 암표상들을 향한 분노만 가득했지, 애초에 처음부터 큰 벽을 느꼈을 디지털 소외계층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반성한다.


이젠 대안이 있어야 한다. 막연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결국 현장판매를 확대하는 방안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티켓이 실제 어르신들에게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노인복지법 상 경로우대 대상인 65세 이상 관중에겐 신분증 확인 후 1인 2매 판매를 하면 어떨까. 온라인 예매가 끝난 뒤 취소표를 판매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현장판매용 티켓을 확보해 놓는 거다. 


물론 설익은 생각이다. 여러 가지 보완해야 할 점들이 있다. 다만 더 늦지 않게 합리적인 대책이 나오면 좋겠다. 정규시즌뿐만 아니라 가을야구, 한국시리즈도 앞으론 다양한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한다. 

                                             

<'야구 보기 참 힘드네…' 온라인 세상 속 소외되는 노인들 (JTBC, 20231108)>


야구의 가치가 빛나는 순간

야구팀들은 저마다의 헤리티지를 자랑한다. '프로야구 원년 창단', '역사와 전통의 강호' 같은 수식어를 내세운다. 오랜 팬들이 없었다면 이어가지 못했을 명성이다. 


야구팀은 태어날 때 정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결국 어르신 세대가 야구에 대한 애정을 자녀에게 물려줬고, 그게 또 이어진다. 지금껏 살아온 날을 세 자릿 수로 셀 수 있을 법한 아기들도 입에 쪽쪽이를 물고 손바닥만 한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에 앉아있다. 중계에 잡힌 관중들 중엔 2대가 함께 왔다거나, 심지어 3대가 함께 야구를 보러 왔다고 쓴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한화 구대성-류현진-문동주로 이어지는 계보는 야구장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 어떤 스포츠가, 그 어떤 문화생활이 이만큼 전 세대를 아우르고 있나. 야구의 가치가 여기에서 출발한다.


선수들은 세대교체가 되어도 팬들은 계속 그 팀에 남아있다. 지나간 선수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현재 뛰는 선수들을 응원하고, 앞으로 들어올 신인들을 기대하며 삶을 야구와 함께한다.


내 기억 속 두 명의 할아버지는 젊은 팬들처럼 열정적인 춤과 노래로 팀에 '응원 화력'을 보태지 않았다. 유니폼도 입지 않았고, 응원 도구도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야구를 좋아하고 팀을 애정하는 게 느껴졌다. 분뿐이랴. 야구장을 다니다 보면 같은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생 선배'들에게 선수들의 사진을 선물 받기도 하고, 하이파이브를 나누기도 한다. 중장년층 팬들이 보여주는 낭만과 진심이 있다. 


젊은 층만 있는 야구장을 바라지 않는다. 내년엔 좀 다른 기사를 보고 싶다. 나부터 고민해야겠다.


1997년 7월 31일 <경향신문> 기사.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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