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집
라이킷 53 댓글 28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로콜리지만 사랑받고 싶어

나의 모습 그 자체로 사랑받기, 사랑하기

by 페이지 스위머 Dec 28. 2024

나는 내가 브로콜리로 태어나고 싶은 게 아니었어.

태어나보니 브로콜리였고 어린이 친구들이 날 모두 좋아하지 않았지.

좋아해 보라고, 다들 먹어보라고 했지만 난 결국 다시 뱉어져 입 밖을 나왔지.


난 내가 브로콜리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이미 난 브로콜리로 이 세상에 나왔고,

이런 모습, 이런 맛이지만 내가 바뀔 수 없다면, 그냥 이대로 나를 사랑해 주면 안 될까.

나는 이대로 사랑받을 수는 없는 걸까?





브런치 글 이미지 1

아이들이 싫어하는 채소 1위에 뽑힌 브로콜리는 사랑받는 채소가 되기 위한 계획을 세워요. 바로 사랑받는 친구들을 모두 따라 해 보는 거죠. 소시지를 따라 분홍색으로 화장도 해 보고, 라면처럼 뽀글뽀글 파마도 해 봅니다. 오이가 인터넷 방송으로 인기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자신만만하게 오이를 따라 인터넷 방송도 해 보지요. 그런데 왜 아무 소용도 없을까요? 브로콜리지만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 브로콜리지만 사랑받고 싶어. 책소개






1학년 둘째 아이가 받아쓰기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브로콜리지만 사랑받고 싶어'라는 문구를 보고서는

"엄마, 나 이 책 얼마 전에 학교에서 읽어봤다!" 하며 자랑했다.

그때는 그저 농담반 진담반으로 "너도 브로콜리 안 먹잖아. 그러니까 브로콜리가 이런 말 하지. 너무 슬프겠다"라고 웃어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고도 며칠이 지난 지금도 이 문구가 맴맴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작 슬퍼진 건 브로콜리가 아니라 나였다.



브로콜리지만 사랑받고 싶어

이 말이 왜 그렇게 슬프게 다가왔을까. 내 모습은 누구나 아이들은 싫어하는 브로콜리지만 그래도 나는 그냥 브로콜리 이 모양 그대로 그저 이렇게 있어도 이 자체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왠지 그저 내 모습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책 이야기를 듣고 책을 찾아보았다. 브로콜리는 처음엔 사랑받고 인기 많은 소시지를 따라 분홍으로 염색도 해보고 아이들이 먹고 싶어 안달해하는 라면도 따라 해 본다. 마치 인스타에서 유행이라는 공구아이템이 보이면 사고 어디서 어떻게 쓸지, 내 취향인지, 나에게 쓸모가 있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소유하는 것 자체로 핫한 사람이 되어가는 듯한 욕망을 채우듯 큰 고민 없이 결제하고 있는 내 모습 같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브로콜리는 변하지 않는 브로콜리 그 자체였다. 결국 나는 어떤 유행 아이템을 두르고, 유행하는 명품을 사서 들고 다녀도, 결국 나는 나인 것처럼. 겉은 뻔지르르하게 나를 포장해서 이야기해보지만 결국 그 속은 여전히 나인 것처럼.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겉모습은 따라 할 수 있어도, 말로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이야기하며 아무리 꼬셔도 결국 내가 아는 내 속에 있는 나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싶은걸.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로 10여 년을 살아가면서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결혼 전 같은 회사였던 친구가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축하 카톡을 보냈지만 이틀 밤을 우울 속을 허우적 댈 때도, 아이 친구 엄마들의 좋은 직업을 좋은 회사를 전해 들은 날에도 씁쓸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나를 대변해서 내세울 이름이란 게 없는걸. 경제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니, 나만 빼고 남들은 다 들고다니는것 같은 명품을 사는 것도 왠지 남편 눈치가 보이는 것 같고, 남편은 괜찮다 하나 사라고 했지만 사실 들고 갈 데도 없었다. 내 경력을 포기하는 대신 어떤 게 나올지 몰랐고, 아니 아이만 바라보던 나의 예전의 시선이 점점 내가 가지지 못한 세상을 향해 돌아가는수록 나는 작아졌다.


알바를 뒤져볼까 취업을 뒤져볼까 아이를 돌보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만 고민하다가 지난 시간이 10년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작아지고 작아지고 더 이상 작아질게 없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그곳에서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게 아이를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늦었지만 내가 지금이라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말해주고 있다.

운동도 주식도 부동산도 재테크도 책 읽기도 글쓰기도.

여전히 돈 되는 일은 별로 없고, 명함 되는 일도 없지만, 그저 나는 겉을 반짝반짝 핑크색으로, 꼬불꼴불하게 꾸미는 것보다 브로콜리인 나를 채우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모양은 그저 아직 브로콜리지만 그 안에 아무도 모르는 맛은 더 달큼하고 더 아삭하고 더 뽀득한 맛을 내는 브로콜리가 되기 위해.


브로콜리 그 자체의 모습을 내가 먼저 바라보고 사랑하고 그 안을 채워가기로 했다.

결국 나 자신부터 브로콜리 자체의 모습을 사랑해야 남들도 브로콜리를 사랑해 줄 테니까 말이다.

브런치를 오늘도 쓰는 이유. 더 맛있는 브로콜리가 되기 위해.






나는 내가 브로콜리로 태어나고 싶은 게 아니었어.

태어나보니 브로콜리였고 어린이 친구들이 날 모두 좋아하지 않았지.

좋아해 보라고, 다들 먹어보라고 했지만 난 결국 다시 뱉어져 입밖을 나왔지.


난 내가 브로콜리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이미 난 브로콜리로 이 세상에 나왔고,

이런 모습, 이런 맛이지만 내가 바뀔 수 없다면, 그냥 이대로 나를 사랑해 주면 안 될까.

나는 이대로 사랑받을 수는 없는 걸까?



브런치 글 이미지 2

우리 피오나들 덕분에 잘 꺼내지 않던 쭈굴한 이야기를 끄적여 보는 2024년이 끝나가는 밤에.

(이 글은 알콜에 젖은 뇌와 손가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13번째 결혼기념일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