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친구가 청첩장을 건넸다.
남녀의 실루엣이 그려진, 도톰하고도 폭신한 질감의 청첩장이었다. 앞면에 단단히 매어진 푸르스름한 리본이 두 사람의 실루엣을 꽉 잡아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흔하디 흔한 프러포즈 얘길 수줍게 말하는 친구의 얼굴은 밝아졌고, 그에 비해 나의 채도는 조금 떨어졌다. 나는, 결혼할 수 있을까.
어느덧 친구들의 대화들이 백색소음처럼 아득해졌다. 듬성듬성 띄엄띄엄 떨어져 있던 기억을 잇다 보니 처음 결혼을 꿈꿨던 그 날과 마주하게 되었다. 고작 30회를 살아낸 나에게 27회째에 찾아온 첫사랑. 나는 늘 사랑에 있어 이기적이었다. 나를 가장 사랑했던 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미치게 빠져들었지만 결국엔 언제 그랬냐는 듯 내가 먼저 그 세계에서 발을 빼곤 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사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중에 끊기 일쑤였다. 나를 위해 그랬다고 자위했지만 결국 나를 가장 나쁘게 만들었다.
그러다 그 사람을 만났다. 많은 아픔과 그로 인한 상처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다시금 상처받을까 봐 감정을 숨긴 채 늘 웃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향한 비난과 미움받는 것에 염증이 커 끝까지 고민을 들어주고, 시간을 내어주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피곤한 사람이 어느새 내게 스며들었다. 처음이었다. 가족 아닌 누군가와 이토록 함께 살고 싶다 생각한 것이. 처음으로 누군가와 아침을 맞이하고, 밤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두 발을 모두 담글 수도, 할 수 없이 발을 뺄 수밖에 없대도 이번만큼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깊게 빠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다정해야 하는 이는 오롯이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그의 9할이 내 것이라도 결국 남은 1할 때문에 외로웠다. 어차피 그와의 엔딩이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내내 차라리 빨리 끝나길 기다렸다. 그가 실수하길 내심 바랬다. 내 실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너 때문에 끝났다는 맘이어야 내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차마 그 얼굴을 보며 헤어질 용기가 없어 문자 한 마디로 모든 걸 종결 지어버리곤 도망치듯 자취방을 비웠다. 후회했다. 그리고 원망했다. 보통의 평범한 남자였음 하는 쓸모없는 미련이 딱지처럼 앉았다. 한없이 이기적인 나를 끝없이 끌어안아준 그 사람이 밑도 끝도 없이 그리웠다. 이별 후에 또 다른 사랑이 움튼다지만 그 또 다른 사랑을 담보로 지금의 사랑을 져버릴 여자가 누가 있을까.
그렇게 한참을 방황하다 한 사람을 만났다. 답답할 정도로 둔감한 사람이지만 나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슷한 취향과 감성을 지닌, 꿈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와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음울의 늪에 빠진 나에게 먼저 아름답다, 손을 뻗어준 사람이었다. 고마웠다. 뜨거운 무언가가 다시 움트는 기분이었다. 사랑했고, 애틋했고, 그가 없는 내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너무 간절해서일까. 그를 안으면 안을수록 서로의 색이 강한 무언가가 부딪히기 시작했다. 아팠다. 끊임없는 대화와 타협으로 부딪히는 것들을 맞추려 했지만 결국 서로 절대 좁혀지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했을까. 너무 아팠을까. 상처가 곪았을까. 아니면 지쳤을까. 어제오늘 묵묵부답인 그와 똑같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가만히 있는 내가, 우리가 안쓰럽고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 친구들의 당황한 얼굴이 흐려지며, 백색소음이 어느새 김동률의 음악으로 바뀌어 내 마음에 가득 차올랐다. 나는, 결혼할 수 있을까. 다른 아무도 아닌 너와 할 수 있을까. 너와 함께 꿈꾸던 그 모든 소소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나는 할 수 있을까. 나는, 너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