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해된다니까, 구겨서 던지기.
요즘은 일부러 해보지 못한 일들을 해보려 하는데, 그중 하나가 페디큐어를 바르는 경험이었다. 페디큐어를 해주던 분이 일곱 살이 된 딸 한 명을 키우고 있다고 하셨다. 무심코 “저희 첫째도 일곱 살이에요.”라고 했다가, “아, 그럼 둘째도 있어요?”라고 물으셨고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한 문장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둘째에 대해 설명해야 했고, 나는 이내 세 살이 되어 손이 많이 가는 딸도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그래도 둘이 놀면 엄청 예뻐요.”
또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이가 한 명이라고 해야지 다음에 탈이 없다. 두 명이라고 했다가, 한 명밖에 없는 모습을 보면 분명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하나라서 외롭지 않아요?”, “둘째 낳을 생각은 없어요?” 왜 그런 질문들이 뒤따라오는지. 그럴 때는 아이를 하나밖에 안 낳은 엄마처럼 또 거짓말을 한다. “아이가 동생 이야길 하긴 하는데, 하나 키우기도 힘들어서요.”
두 가지 모두 거짓말이면서 전부 거짓말은 아니다. 아이가 있었으니,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지금은 아이 한 명이 없으니, 한 명만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다. “아이가 두 명인데, 한 명은 하늘나라로 소풍 갔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마음에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말을 하면서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상담사는 내가 도덕적 기준이 지나치게 높다고 했다. 기준이 높아 치료에 방해될 거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방탕하게 사는 게 좋냐고 묻는다. 도대체 도덕은 뭐고, 방탕한 삶은 뭐길래? 삶의 어두운 면을 가리고 싶었을까. 사랑받지 못한 내면 아이의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신을 향한 순수하고 열정적인 믿음 때문일까. 왜 그토록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써왔는지, 그 기준은 뭐였는지. 어른이 되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온 시간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든다. 선과 악을 나누고 판단했던, 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불안하고 조급했던 마음이 떠오른다. 진짜가 아닌 만들어진 형태의 척과 웃음만 기억난다.
장례식장에서 아는 동생이 미소 짓는 나를 향해 "웃지 마."라고 말했다. 웃겨서 웃은 건 아니고, 습관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도 웃지만 어색해도 웃고, 상대와 눈이 마주치면 웃는다. 어린 시절 '혼자 먹기 달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컨테이너에서 얼음장이 된 물을 끓여 쓸 때도, 아빠가 도박하고 와서, 엄마의 고막을 터트렸을 때도, 외롭던 엄마가 크게 아프면서 수술받을 때도, 병간호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도 웃었다. 상담실에 처음 들어갈 때도 웃었고, 슬퍼서 울다가도 분위기가 무거워졌다며 웃는다. 기분과 상관없이 상대방이 불편할까, 어색한 분위기를 넘기려 웃는다.
사랑받지 못해 외로워하는,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내면 아이를 안아줘야 한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난 이미 많은 이를 돌봐야 하는 어른이라는 사실 앞에 서서 내면 아이를 외면한다. 나에게 있어 어른은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하며 웃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나의 이익보다는 상대방의 욕구를 충족시킬 줄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존경받는 어른이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항상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힘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좇아가기에 한참 부족하지만 추구하던 가치들이다.
치료에 방해된다던 도덕적 기준과 추구하던 가치를 의식적으로 구겨서 멀리 던진다.
아이가 줄넘기를 사달라고 한다. 아홉 밤을 자고 나면 유치원에서 줄넘기 대회가 있다며 연습하러 나가자고 한다. 처음 하는 줄넘기에 발은 걸리고, 박자는 하나도 맞지 않는다. 마음만 급해져서 줄은 빨리 돌리려 하고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아이는 매사에 잘하고 싶어 하지만, 처음부터 잘할 수 없다. 아이가 요즘 잘하고 싶어 하는 줄넘기와 피아노는 재미없고 지루한 기초 쌓기 시간을 가져야 한다. “친구들은 줄넘기 빨리하던데, 나 보고도 빨리하래.” “친구가 피아노로 고양이 춤을 엄청 빨리 치는 거 있지. 다른 애들이 다 잘한다고 손뼉 쳤어.” “엄마 일등 하고 싶은데 못할 거 같아. 대회 나가기 싫어.” “도레미파솔라시도 그만치고 싶어.” 아이에게 몇 번이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꼭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차근차근 연습하면 잘하는 순간이 올 거야. 정확하게 해야 빠르게 할 수 있어. 줄넘기를 못 넘던 네가 하나를 넘었다는 사실만으로 대단한 거야. 일등 하지 않아도 돼. 대회까지 연습하려고 하는 네 모습이 예쁘다.’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지. 잘하는 친구들의 이름을 말하며 짜증 내고, 어떤 친구는 자기보다 못한다며 위안을 얻는 표정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아이와 다를 건 없다. 매사에 비교하고, 불안해하고, 때로는 위로받는다. 비교로 생긴 불안은 오래가고, 비교로 얻은 위로는 금방 사라진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혐오해왔고, 매사 비교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자책했다. 비교는 자책으로 이어지고, 자책은 나를 갉아먹기만 하는데도 버리기가 힘들다.
내가 겪는 고뿔이 제일 힘들다고, 누구나 자신의 힘듦을 안고 살아간다. 그동안은 힘듦을 안고 살았지만, 행복을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가족 두 명을 함께 잃으면서, ‘이보다 힘든 일을 겪을 수 있을까.’라고 자주 억울해하고 힘들어했다. 매일 ‘행복할 수 있을까?’ 질문한다. 물론 자녀를 먼저 보내는 일, 엄마와 갑자기 헤어지는 일, 자녀와 엄마를 한꺼번에 보내야 하는 일은 억울하고 힘든 일이다.
요지는 진짜 힘든 일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힘들고 괴로운지의 비교는 불안만 줄 뿐 위로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스스로, 누군가를 향해서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비슷한 경험을 했더라도, 구체적인 상황과 겪는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울타리 밖의 사람들도, 가족들도 나와는 다른 타인이다. 나 자신에게 부탁하자면 더 이상 내가 기준이 되어 타인에게 화살을 쏘는 행위를 하지 않기를, 주변에 ‘지금은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불쌍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힘듦은 잠시 넣어두고 들어줄 수 있기를.
이래저래 쓰다 보니 구겼던 종이-추구하던 가치-를 다시 펴서 본 기분이다. 치료에 도움 안 된다는데 괜히 썼나 싶지만 차마 지우지는 못한다. 비교가 마음을 갉아먹는 건 확실하니까, 추구하던 가치를 다시 펴본다 해도, 비교를 구기는 것으로 하자. 지겨운 불안을 던지는 척이라도 하자.
비교를 구기게 된 또 다른 이유이자 마음에 관한 글을 쓰게 된 첫 단추에는 ‘나를 살리고 사랑하고(현요아지음)’ 책이 있었다. ‘힘든데 어떻게 책을 읽고, 글을 쓰냐. 난 글이 눈에 안 들어오더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나도 책 읽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우연히 브런치를 알게 되었고, 작가님의 책 소개만으로 고민 없이 주문했고, 운명적으로 마음에 새겨지는 글을 만났다.
앞으로 생을 등진 동생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큼의 고통이 또 찾아올지 장담할 수 없으나, 책을 낸 뒤에도 여러 불행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올 것이 분명하다. 그때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또 일어나는지 절망스럽겠지만, 고통이 너무나 커서 웃음을 고르는 힘이 상실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누가 더 힘든지 겨루는 불행 배틀은 하지 않으려 한다. 나아지는 것은 없으므로.
160p
책을 덮고 나서는 스스로의 아픔을 면밀히 해석하고 해독하기를. 그래서 기어코 불행 울타리를 깨고 나와 닿음이 소중해진 사회에서 온기를 나누기를 바란다.
프롤로그
결국 다른 사람의 글을 빌려 마무리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고, 에세이를 쓰는 작가라고 말하기 부끄럽다. 하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결론을 쓰는 순간도 있으리라 믿고, 잠시나마 사랑하게 된 작가님의 글을 빌려 새겨본다. “이제는 불행 배틀을 그만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