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사십대 회사원 김씨
Nov 20. 2023
성숙한 사회 - 톨레랑스와 서(恕)
논어(論語) - 위령공편(偉靈公篇) (공자, 孔子)
서구의 성숙한 사회를 특징짓는 한가지를 꼽자면 '관용(톨레랑스, tolerance)'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여러 다양한 가치가 충돌할 때 우리는 하나의 최선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중에 여러 소수의견, 소수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수결이라는 명목하에 무시되곤 한다.
“다수의 의견이기에 따라야 한다.” “다수의 의견이기에 선이다.” 라고 하지만 다수의 의견이 최선일까? 아니 최선은 둘째 치고 과연 선이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을 기지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때는 선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경우가 있다. 그래서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
성숙한 사회는 다양한 가치가 충돌할 때 각자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듣는다. 듣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연습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듣고 있는 것은 굉장한 고역이다. 그래서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에는 반드시 관용이 중요한 위치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잘 참고 귀 귀울여 듣는다. 그리고 나와 다르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한번쯤 생각해 본다.
이정도 과정만 거쳐도 소수의 견해가 묵살될 가능성은 확연히 줄어든다. 그리고 가능한 최선 또는 선을 향해가는데 조금이라도 오류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사회 전체의 선이 증대되고 그 만큼 사회는 더욱 안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안정 속에 더 큰 관용이 생기는 선순환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럼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관용의 전통이 전혀 없는 것일까?
한국은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유교적 가치관이 전체 구성원의 가치관의 기저에 깔려있다. 유교의 기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논어를 읽다 보면 많은 부분이 거부감 없이 쉽게 읽혀 진다. 서양의 고전 텍스트를 읽을 때 많은 경우 곳곳에서 막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논어를 읽다 보면 관용과 유사한 개념이 나온다.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자공이 공자께 “평생에 걸쳐서 행할만한 한마디 말이 있을까요?”라고 묻자
공자께서 “그것은 서 (恕) 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 라고 답하셨다.
서(恕)는 논어뿐만 아니라 같은 사서(四書) 에 속하는 중용에도 등장하는 유교의 매우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恕는 “용서하다” “어질다”라는 뜻을 갖는다. 恕는 如(같을 여)와 心(마음 심)으로 풀어 쓸 수 있다. 如心 “같은 마음” 즉 타인과 같은 마음 다시 말해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같다 그래서 용서할 수 있다는 의미로 까지 발전 된 것이라 생각한다. 공자는 이러한 마음을 뒤에 풀어서 설명한다.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같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남, 타자)에게도 시키지 말라고.
난 이것을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라고 풀어서 말하고 싶다. 같은 마음이라고 하면 많은 경우 同心이라는 한자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如와 同은 한국말로 “같다”로 번역되지만 내가 느끼는 뉘앙스는 꽤 다르다. 同心이라고 하면 우리가 일심동체에서의 경우처럼 단일화 된 느낌 즉 “하나가 된 마음” 정도의 뜻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如心이라고 하면 “똑 같다”라는 의미 보다는 뉘앙스상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똑 같지도 않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똑 같은 마음(同心)”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如心을 “같은 마음”이 아니라 “다르지 않은 마음”이라고 풀어서 말한 것이다. 즉 너는 네가 옳다고 믿는 것과 같이 나도 내가 옳다고 믿는 마음이 있다. 그러한 개개인의 생각들이 다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恕를 풀어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좀 넓게 풀어서 아니 조금은 자의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 또한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내가 그러하듯이 남의 생각도 존중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공자의 풀이가 아쉽다. “남”에게 행할까 말까의 기준을 “나”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좋은 것은 남에게 행해도 된다는 것으로 오역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공자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맥락 상 그렇게 해석되지도 않고.
공자가 똑 같음 보다는 차이를 인정했다는 것은 논어의 자로편에서도 찾을 수 있다.
君子 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지만 획일적이지 않고 소인은 획일적이고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和는 조화다. 앞서 말한 대로 同은 똑같음 즉 획일적이다. 그래서 매우 좁고 폐쇄적일 수 밖에 없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군자가 조화를 추구하지만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은 군자가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조화라는 것은 같은 것들을 모아 두었을 때 필요하지 않다. 조화는 다른 것들이 모였을 때 이를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다. 조화의 기본 전제가 다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들을 다른 그대로 인정하고 그들을 잘 어울리게 하는 것 그것이 군자이다. 恕는 和에 이르는 방법이다. 여러 다른 것이 섞여 있을 때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자연 조화를 이룰 수 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군자는 恕를 평생에 걸쳐 마음에 품고 행동의 기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소인은 조화를 추구하지 않고 획일적이다. 즉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한다. 소인은 자신만 옳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소인이 권력을 쥐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전제(專制) 정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전제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의 권력을 한 개인이 장악하고 그의 힘에 의하여 모든 일을 처리함, 다른 사람의 의사는 존중하지 않고 제 생각대로만 일을 결정함” 이다. 한 사람에 의해 그의 생각대로 모든 일이 결정되는 사회. 하나의 가치관만이 인정되는 사회.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고 답답하다. 우리가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참을 줄 아는 연습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누군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을 때 그의 편에 설 수 있는 용기까지 갖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볼테르가 말했다는 또는 그를 옹호하는 누군가가 말했다는 아래 문장으로 마무리 할까 한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