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즈플 Nov 27. 2023

밥통이 가장 먼저 들어갔어야 했어 1

'손 없는 날'



저희 집은 민간신앙을 잘 믿는 집이라 장례식을 다녀오면 꼭 소금을 뿌리는 집입니다. 그래서 미신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익숙한 편입니다.


'손 없는 날.' 모두 한 번씩은 들어보셨죠?

은 

날수에 따라 동서남북 사방위로 다니며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사람에게 해코지한다는 악귀나 악신을 뜻한다.

라고 합니다. 손 없는 날은 악귀가 활동하지 않는 깨끗한 날로 음력 날짜로 끝수가 9나 0이 들어간 날입니다. 즉 음력 9, 10, 19, 20, 29, 30일입니다.


저는 손 없는 날의 반대는 무조건 손 있는 날인줄 알았는데, '손'이 사방위와 관련된 악귀인 만큼 '손 있는 날'도 정해진 날이 있다고 하네요. 

음력으로 끝 수가 1,2인 날에는 동쪽, 끝수가 3, 4일인 날에는 남쪽, 끝수가 5,6일인 날에는 서쪽, 끝수가 7, 8일인 날에는 북쪽에서 귀신이나 악귀가 활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를 들어 이사 가는 곳이 동쪽이라면 음력 끝수가 1,2일을 제외하면 이사할 수 있는 날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손 없는 날에 이사나 결혼 등 인생의 큰일을 치르고는 합니다. 기독교나 천주교는 그런 걸 안 믿어야 하는데 제가 아는 주위 종교인들은 "미신이긴 하지만..."이라면서도  꼭 손없는 날에 이사를 갑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웃음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모습이 우리 한국 같고 정겹지 않나요?


그러다 보니 수요가 모여 손 없는 날이면 이사 가격도 상승을 하고는 합니다. 많게는 세 배까지 오른다고 하니 우리나라와 민간신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듯합니다.






저희 집은 아쉽게도 손 없는 날에 이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그날은 이미 예약이 꽉 차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유, 사모님! 11월은 한 달 전에 전화 주셔서는 포장이사 못 불러요."


이사는 가을이 대목인데 특히 11월은 연말이라 사람들이 많이 밀려있다고 합니다. 하루에 세 팀씩 꽉꽉 스케줄이 들어차 있어 손 없는 날은 이미 두달 전에 마감이 되었다고 하네요. 


어머니는 이사 전날 제게 중대한 임무를 맡겼습니다.


"밥통이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해."


공실이 된 집에 누구보다 밥통과 쌀을 가장 먼저 가져가 거실 한가운데에 두라시는 겁니다. 그래야 새로 이사 간 집에서 풍요롭게 잘 살고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산다고요. 저도 사뭇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죠. 저와 둘째는 포장이사 짐을 싸고 있는 중간에 출발하기로 합니다.





일이 틀어진 건 이삿날 오전입니다. 차가, 시동이 갑자기 돌지 않습니다. 게다가 긴급출동을 부른 사이에 포장이사차가 도착해 좁은 골목길을 꽉 매워버렸습니다. 


이럴 수가. 계획형인 제가 열심히 세워놓은 계획이 일어난 지 30분 만에 모두 어그러져버린 상황. 어머니는 어차피 함께 출발해도 트럭보다 승용차가 빠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손톱을 잘근거리다가 트럭이 빠지자마자 밥통을 껴안을 동생을 싣고 낡은 마티즈가 부르릉, 골목길을 나섰습니다.


"우리 진짜 가는 거야?"

"응! 새 집 가는 거야! 노래 좀 틀어봐!"


신이 난 자매는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따라가면서 룰루랄라 고가도로를 달립니다. 차가 조금 막히지만 주말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죠. 밖에 한강이 보이는데 어찌나 하늘이 맑은지 한강도 반짝반짝 우리의 이사를 축하하는 느낌입니다.


"언니 한강 너무 예쁘다~"

"그러게!"


이 바보들. 강을 건널 때 이상함을 감지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강북에서 강북으로 이사를 가는데 왜 강을 건너고 있는 걸까요. 하지만 지리에 무지한 둘은 그때만큼은 이상함을 몰랐습니다. 어머니에게 중간에 전화가 왔을 때도 "응! 15분 남았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제가 불길함을 감지한 건 도착지점 5분 전이었습니다.


"야... 그런데 우리 왜 영등포구야?"

"어엉? 그게 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는 동생 대신 제가 지도를 봅니다. 아파트 이름은 같은데, 지역이 다릅니다. 핸드폰이 집주소를 헷갈린 겁니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구를 잘못 찍었습니다. 사색이 되어선 저희가 가야 하는 아파트를 다시 검색하자 강을 다시 건너 강북으로 가는 시간은 '55분'이 걸린답니다. 뒷목이 뻐근해집니다.


"중간에 그걸 왜 못 알아채! 다들 정신머리 어디다 뒀어!"


어머니의 역정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밥통을 가장 먼저 두는 건데, 우리 때문에 이삿짐을 들이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요.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주문한 가구들이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를 어째요. 거의 울먹이면서 속력을 높여보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날아가지 않는 이상 유의미하게 시간을 줄일 수 있을 리 없습니다.


"바보야... 나는 바보야..."

"강을 지나면서 왜 몰랐지... 강이 왜 그냥 예뻤지..."


서로 번갈아가면서 자책 퍼레이드를 벌이던 자매가 무릎으로 기어 아파트를 올라갔을 때는 짐이 한창 올라오고 있을 때입니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어머니는 눈을 흘기면서 지금이라도 밥 드시게 밥통을 안방에 두라고 하십니다. 누가 먹으라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죄송합니다. 이거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면서 밥통과 쌀자루를 두고 나왔습니다. 


"그래도 액땜 지대로 했으니 잘 살겠다."


저희의 넉살에 어머니는 픽 웃으면 얼씨구 하셨습니다.

그래요. 이삿날의 어처구니 없는 헤프닝은 그렇게 모두 끝나야 하는데. 집주소와 관련된 악연이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밥통이 먼저 들어갔으면 앞으로 이어질 사건들도 없었을까요?


다음화 : 밥통이 가장 먼저 들어갔어야 했어 2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거만 싼 거 찾지 마! 딸들 속상하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