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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n 28. 2024

지우개를 쓰고 싶어서

지우개를 쓰고 싶어서



마흔여섯이고요 

딸 둘 키우고 있어요 


사육은 이십 사에 불과했는데    

'마흔여섯'이라는 제목이 붙은 초상화 앞에 

정면으로 붙들렸다  


나이에서 탈출하려면   

흰 눈이 필요해 


어린 나는 너무 쉽게 

흰 눈을 맞았다 

흰 종이를 동그라미로 채우면 되었다  


단, 동그라미 안은 비워둘 것 

채우면 돌이 된다 


과연 눈이 될까

-의심부터 하는데 뭐가 되겠어

눈송이 크기가 문제야

-문제라고 말하는 게 문제지 

눈송이가 크면 눈으로 안 보일 거야 

-눈송이가 작으면 점으로 보일 걸

(걱정스러운 눈빛)

아무도 눈이라고 안 봐주면 어떡해 

-아직 아무것도 안 그렸거든

겁나 

-차라리 눈을 감고 그려 

괜찮을까

눈이 종이 밖으로 튀어 나가면 어떡해 

-나 갈게 


어린 나와 나이 든 나는 대화가 안 된다 


눈을 감았다 

고요하니 어린 나가 조금 더 많이 보였다 


매스실린더 샤알레 비이커 알코올램프 푸른 리트머스 종이 삼각 플라스크 스포이트 물체주머니 

물방개 소금쟁이 개구리밥 부레옥잠 플라나리아 메트로놈 실로폰 캐스터네츠 트라이앵글 

정글짐 구름사다리 탐구생활 종이인형 구슬 실내화 주머니 연습장 운동장 


좋아하는 단어만큼 눈을 그린다 

나이 든 나는 여전히 어린 나를 사용한다


책을 읽고 노트에 필기한다

책받침도 사용한다

무거운 샤프 가벼운 샤프 바꿔가며 쓴다

샤프심 넣는 순간을 기다린다 

오늘 아침 마침 지우개를 다 썼다

새 지우개가 준비되어 있다 

연필과 색연필을 커터칼로 깎고 다듬는다

색연필로 기억하고 싶은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오리가 그려진 철제 필통이 서랍 안에 있다

사각자도 두 개나 있다


눈을 뜨고 눈을 다 지운다 

새 지우개를 쓰고 싶어서 


지우개 밥을 똘똘 만다

자, 지우개 똥! 

-아싸라비야 삐약삐약!

어린 나는 지우개 똥을 받아 

조물락 조물락 논다 


좀 더 지운다 

좀 더 지우개 밥을 똥으로 만든다 

이제야 

지운 흔적이 눈으로 보인다 


-내 차례야 


저는 집에 있기 무료해서 나왔습니다

차분하게 오래 들여다보고, 섬세하게 그리는 거 제일 못 해요

언젠가부터 길가에 꽃이 보이고 

꽃 따라 시간이 흐르더라고요

시간을 꽃으로 기록해보고 싶습니다


조막만 한 목소리 

지우개 똥을 굴리며 

자기소개를 마쳤다


다음 주에 나가야 할까 


지우개 똥만 생겼네

-지우는 시간을 똥으로 기록한 거잖아

-지우개에서 탈출한 지우개 똥이 기뻐하는 거 안 보여 


어린 나는 나이 든 나를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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