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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08. 2024

순한커플 어린이들

급한덕은 더듬더듬 똑순애는 뽕긋뽕긋

  순한커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연필을 쥔다. 엎드려 글쓰기 모드에 돌입. 눈 내리는 풍경처럼 고요해지더니 스걱스걱 연필소리만 난다. 더듬더듬 한 글자 한 글자를 기억해 내며 시를 써 내려가는 급한덕. 물고기처럼 입을 뽕긋뽕긋 퐁퐁 물방울 터뜨리는 소리를 내며 쓰는 똑순애.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똑순애가 먼저 시 쓰기를 마쳤다. 시를 마무리할 때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시를 써 내려가는 급한덕의 모습이 놀라웠다. "시시시작!"을 외쳤을 뿐인데 정말로 순한커플의 생애 첫 시가 탄생했다. 마법 같았다.  


눈     ㅣ 똑순애


눈이 하얗게

소북소북 왔는데 금세 녹아 버렸어. 

그런데 해가 벌-겋게 떴어.


눈이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사람     ㅣ 급한덕


어머님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고 없어진 동생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옛날 눈썰매 타던 생각이 납니다. 눈은 정말 마음이 상캐하고 정말 좋은 눈일 줄 알고 있습니다.


  똑순에는 읽는 속도는 빠르지만 쓰기에는 서툴렀다. 반면, 급한덕은 읽는 건 느려도 대략 무슨 내용인지 알아볼 수 있게는 썼다. 틀리게 쓴 낱자를 보고 단어를 추리하고 문장으로 조립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똑순애는 생각나는 대로 적지 못해 애를 먹은 모양이다. 쑥 꺼져 있다가 요괴딸이 맞춤법을 알려주자 바로 의욕적으로 변했다. 아... 똑순애는 맞춤법에 맞게 쓰는 것에 관심이 많구나. 흥미로웠던 것은 똑순애의 시는 짧았지만 본능적으로 행과 연의 구분을 하고 있었다. 


  시 쓰기를 마치고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급한덕은 똑순애의 낭독에 집중하지 않고 본인 시를 읽어보느라 바빴다. (급한덕은 말 잘 안 듣는 학생이었음이 분명하다) 서로의 시를 듣고 좋았던 부분을 칭찬하자 했더니 둘 다  "다 잘 썼어. 다 잘 됐어." 뭉뚱그려 말해버린다.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법을 알려주고 해 보라니 시 쓰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렸다. 


  진짜 시 수업처럼 해보려고 급한덕 어린이, 똑순애 어린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최대한 존댓말을 쓰려고 의식했다. 다음 수업시간에는 '새'나 '쥐'를 소재로 시를 써보자고 미리 알려주었다. 소재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 시를 쓰는 부담이 덜어질 것 같아서였다. 


  수업 시작부터 녹음을 했고 녹음 파일을 처음부터 들어보니  "깜짝 놀랐다." , "너무 잘 썼다." 요괴딸의 오버 리액션이 거슬렸다. 요괴딸이 순한커플에게 요청했던 '구체적 칭찬'은 없고, 과잉된 칭찬만 난무했다. 칭찬을 푸짐하게 해 줘야 시를 쓸 거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듯하다. 수업 진행할 때는 몰랐는데 우리는 깔깔대며 많이 웃고 있었다. 특히, 똑순애가 시 쓰는 급한덕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읽혔다. 


  "으헤헤헤. 많이 썼네. 방한덕이. 

  (애교스럽게) 나는 못 썼쪄.

  글이 안 나와. 방한덕 시 잘 쓰네. 

  나는 눈도 안 보이네. 으헤헤헤."


  개구쟁이처럼 깔깔대며 해맑게 웃는 똑순애. 어린이 똑순애가 꼭 저렇게 웃었을 것 같다. 똑순애의 웃음에 급한덕도 따라 웃는다. 웃는 것도 역시 급하군. 수업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 편을 돌아가며 한 행 씩 낭독했다.


  눈 내리는 밤 ㅣ강소천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이 들고

  엄마도 잠이 들고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눈 내리는 밤'을 다 읽고 나니, 급한덕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나하고 어떻게 얘기를 해? 

  (잠시 고민) 음... 나는 개 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똑순애와 요괴딸은 어이없어하며 웃는다.  어릴 적 고무줄, 잡기 놀이, 줄넘기 등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친구들과 박자를 맞춰 놀이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던 외침이 있었다. 


   시를 시작한 오늘, 요괴딸의 주문이 순한커플에게 통했다. 노랑 연필 쥐고 쓰는 급한덕, 초록 연필 쥐쓰는 똑순애.   


  "시시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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