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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Oct 02. 2023

휴식이 필요해

드디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가 보면 어때?"


나의 퇴사를 알게 된 많은 이들은 이번 퇴사 결정이 하나같이 매우 기쁜 소식이라도 된 듯 '이번 기회에' '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긴 시간 동안을 악착같이 직장에 매달려왔던, 나를 향한 위로의 말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여행이라니.

내 손으로 사직서를 작성하여 미련 없이 손을 털었지만 단물이 빨리고 버려진 쓰레기처럼 억울하고 불쾌한 기분이 떨쳐지질 않았다. 여행은커녕 휴식기를 충분히 가지는 동안 '나'란 사람을 들여다보겠다던 계획도 더 좋은 직장에 취업하거나 무엇이든 해서 보란 듯 성공하리라는 복수심(?)에 잠조치 편히 잘 수가 없는 날이 이어졌다.


출근을 하며 만들어진 나의 생체리듬은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아침잠을 앗아갔고 일찍 일어나 출근하지 않는 하루는 생각보다 길었다. 보지 않던 드라마를 시리즈로 돌려보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찾아보다가도 어느새 생각의 끝은 '새로이 시작할 나의 직장'을 향했다. 


유치원, 지긋지긋하지 않아? 이번 기회에 아예 직종을 바꾸면? 

문득 이직을 생각하게 된 하루는 일반구직사이트를 훑었다.


'내 경력으로는 일반 회사에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그럼, 조그만 가게를 얻어 뭐라도 해 볼까.

마땅한 가게 자리가 있나?

자영업을 생각하게 된 하루는 부동산 사이트를 훑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게를, 뭘 가지고 어떻게 시작하나?'


아니면 차라리 공부방을 차려볼까?

공부방 창업을 생각하게 된 하루는 공부방창업 업체를 훑었다.


'공부방을 집에서 하면 우리 아이는 공부를 어디서 하나?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은?'


그러다가 현타가 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학기 중이라 지금은 마땅한 자리가 없을 텐데. 

일단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업종이라면 해 볼만 하지 않을까?

마음을 다잡고 딱 보름 가량을 구직사이트를 훑어보며 수십 통의 이력서를 적고, 면접을 보다 프랜차이즈로 운영되는 유아대상 학원에 관리직으로 취업을 했다. 급여는 원래 받던 연봉의 반 정도에 불과했지만 근무 시간이 짧고, 원장으로 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부담감이 없다는 점이 좋았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움직인 건 당신도 십여 년 전에 유치원에서 일을 하셨다며 나의 손을 꼭 잡은 원장님의 미소였다.


현관을 들어서면 커다란 홀을 기준으로 양쪽에 반듯이 잘라놓은 조그마한 교실들이 이어져 있었고 교실 안에는 초등학교 교실처럼 배치된 책상이 놓여 있었다. 기저귀를 차고 오는 아이부터 초등 전 연령 아이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은 짜인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받고 3시가 넘으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원을 했다.

출근을 하면 등원맞이를 하고 전화를 받거나 원장님의 업무를 보조하고 각 학급에 손이 필요하면 돕고, 하원 지도를 하고. 말이 관리직이지, 허드렛일이 태반을 차지하는 업무들은 단순했으나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전임 원감이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한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몸이 많이 피곤했다. 


유치원과 달리 교사대 유아의 비율이 매우 낮았지만 아이들 통제가 잘 되지 않아 선생님들이 애를 먹었는데, 기관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좁은 교실 안에 놀잇감이라고는 쌓기 블록 두 상자 정도뿐이었고 전이시간이나 홀에서 놀이하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장난을 치거나 소리를 질러댔다. 책상 앞에 앉아 교재를 하는 수업시간에 익숙한 아이들은 그 이외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


놀 줄 모르는 아이들. 이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면,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없는 이런 환경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참지,

조금 더 타협하지,

그 나이에 그 정도 연봉에 그런 지위를 누리려면 당연히 맞춰야지......

그걸 놓고 나가다니.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나 돈, 지위가 아니다.

열정으로 일궈낸 성과들을 누군가가 가로채고 폄하하고 무너뜨릴 때.

나의 신념과 교육철학을 지켜내기 위해 퇴사를 선택했다는 것을 망각한 채 

나 스스로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그래. 지금은 일할 때가 아니다.

그리고 드디어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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