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소울메이트
10년 동안 살던 동네 놀이터에서 시소가 사라졌다.
어떤 아이가 놀다가 떨어져 다친 이후 결국 철거를 한 모양이다.
나도 친구랑 시소를 타다 크게 다친 적이 있다.
내가 20살 때 일이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그 친구랑 친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두가 그 친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숭이 없고 농담을 잘하며 친구들을 편하게 해주는 엄청난 능력이 있는 친구였다.
성격도 호방했다. 특히 얼굴을 망가뜨리며 웃긴 표정을 지었던 그 아이가 난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 친구가 마냥 외향적인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비공식 절친이 되었다.
무리에서 절친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눈치를 보는 아이들이었다.
뭐든 몰래몰래 나눴다.
반에서 뜻하지 않은 주목받는 행동을 하고 부끄러워하며 내 뒤에 숨었다.
하기 싫은 일을 떠맡고 사실 하기 싫었다고 뒤에서 나에게 털어놓았다.
따로 하교하는 척하고 중간에서 슬쩍 만나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잘 웃고, 또 잘 울고, 말도 잘하고, 위로도 잘하고 무엇보다 욕도 잘하던 시원시원한 네가 난 참 좋았다.
난 너무 좋다 못해 친구 그 이상의 형용할 무슨 단어가 필요했다.
그렇게 우린 소울메이트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소울메이트였다.
그 친구가 전학을 간 후, 우리는 연락과 만남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끊임없이 우린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침내 성인이 되었다.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알바도 하고 좋아했던 영화도 만나서 마음껏 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뚝.
점차도 아니고 어느새 뚝. 우리는 끊어졌다.
난 당연히 부재를 느끼고 간간히 연락을 이어갔다.
보고 싶다, 언제 한 번 보자.라는 말은 이미 지겹도록 들은 상태다.
그렇게 지쳐서 놓은 지 1년째 되는 날, 새해 인사가 왔다.
나는 반가웠지만 그 인사를 끝끝내 확인하지 않았다.
또 상처받기 싫은 마음에.
내 인생 첫 손절이었다.
너무 큰 마음을 주어서 내가 허우적대다가 잠긴 꼴이다.
난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도 늘 경각심을 갖는다. 내가 너무 애정하는 상대에게 마음을 100으로 줄까 봐.
어쩌면 나의 소울메이트는 이런 내가 어느 새부터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어렸던 스무 살의 나는 그 아이가 미웠고, 우리의 추억을 잃어 슬펐고, 마음을 다 내어주고 남은 게 없던 내 자신이 불쌍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그 친구도 다쳤었는지 궁금하다.
시소에서 덜컥 내린 나로 인해, 너도 아팠는지.
그 시소를 내리기 전, 살이 쓸려도 참고 있었던 그때의 나보다.
그래도 너라는 아이를 알게 된 것에 후회는 없다.
덕분에 거리 두기를 확실히 배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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