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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수용의 유연성

(보고서를 지속 수정하는 이유)

by 파포

우리는(나는) 주어진 정보를 소화하기 위해,

구성된 정보 덩어리를 분해(해체) 한 후에

자신의 방식으로 정보를 재구성(재편집)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익숙한 방식으로 정보를 소화한다.




1. 리동


리동(李董, 성이 이 씨인 동사장(회장)을 줄여서 李董이라고 부른다)은 현재 나의 보스로, 나이는 나와 같은 40대 초중반의 중국인 여성이다. 그녀는 투자회사로 시작하여 제조업 분야까지 사업영역을 넓혔으며, 현재는 한국의 대기업 L사와 S사의 일부 사업을 인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일정기간 파견형식으로 근무하며 이 중국인 여성 회장을 모시고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유식한 사람으로, 두뇌회전이 빠르고, 말도 빠르다. 그리고 워크홀릭이다. 회장이자, 현재 본인이 인수한 2개 회사의 CEO를 겸직하고 있는 그녀는 정말 쉴 틈 없이 일한다. 회사를 사고파는 투자자로서 주로 일한 그녀가 직접 경영자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 그것도 복잡한 기술을 가진 제조업을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에 오래 근무한 나도 개발부문과 생산부문의 보고를 들을 때, 깊이 있는 내용은 대강 이해하고 만다.(나는 인사업무를 하고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공부를 하였는지, 그녀는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하고 날카롭게 질문한다.


최근 회사 월례회의에서 수많은 논의거리에 밀려서 나는 주어진 시간에 보고를 할 수 없었다. 회의 말미에 리동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一会你跟我一起去上海,路上我听你汇报 : 이따가 나랑 같이 상해에 가면서 길에서 너의 보고를 받을게“

(Chat GPT가 그려줌)

그래서 상해인근 도시인 쿤산에서 회의를 마치고 급하게 일본구매상과의 식사를 위해 이동하는 그녀의 차에 함께 탑승하여, 약 40분간 업무보고를 하였다. 그중 절반가량의 시간은 그녀가 여러 명과 통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차량에서 몇 가지 의사결정이 필요한 내용들을 급하게 보고하였다. 4가지 어젠다로 각 어젠다마다 압축된 1장의 보고서로 총 4페이지를 출력하여 준비하였다. 그리고 예상되는 추가 질문에 답변하기 위한 보고장표는 십여 장을 별도로 출력하여 준비하였다.


상하이 도심 한복판, 차량 2열에 나란히 앉아서, 내가 준비한 보고서를 보여주며 보고하였고,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리동은 내 보고서를 집중해서 보며, 빠르게 이해하고 몇 가지 질문을 하며 보고를 받았다.

내가 선택한 용어들, 내가 구성한 흐름에 따라, 현황과 결정사항들을 담은 내 보고서를 그녀는 매우 빠르게 소화하였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약어 등 이해 못 한 용어들에 대한 질문 이외에는 중간에 나의 보고를 끊지 않았고,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방식 그대로 보고서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의사결정을 해주었다.



2. 기획담당


기획담당은 나와 같은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사업부가 중국에 매각되며, 회사를 퇴사하고 매각된 사업을 인수한 중국회사에 고연봉으로 입사한 남성으로, 나이는 50대 초중반이다.


나는 일정기간 파견형식의 근무 후 원래 회사로 복귀하는 파견자 신분이고, 기획담당은 중국회사에 정식 입사한 신분으로서의 차이는 있지만, 나와 기획담당의 보스는 모두 리동이고, 나와 업무상으로 수평적인 관계이다. 같은 중국인 보스 밑에서 동병상련(?)을 느끼며, 평소 많은 업무교류를 하고 있다.


얼마 전, 기획담당이 커피 잔을 들고 내 사무실에 들어왔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나는 내가 작성 중인 보고서를 기획담당에게 보여 주었다. 내 나름의 스토리라인에 따라 현황이 정리된 자료였다.

(Chat GPT가 그려줌)


내가 넌지시 보여주며 구두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획담당은 내 책상 위에 있는 보드마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뒷 벽면 화이트보드에 내가 작성한 표와는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frame으로 정보를 재구성하면서, 나에게 숫자를 불러달라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기획담당에게 다시 내가 작성한 보고서를 같이 봐줄 것을 요청하며,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며 내 설명을 들으면, 그가 알고 싶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내 보고서에 내가 구성한 내용들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논의 중인 주제에 대해 본인이 화이트보드에 그린 대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였다. 나는 할 수 없이 그에게 원하는 숫자들을 불러주어, 그가 알고 싶은 방식대로 정보를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떠난 후, 내가 작성한 보고서의 표와 그가 적은 화이트보드의 표를 가만히 비교해 보았다. 아무리 봐도, 누가 봐도 내가 작성한 보고서가 훨씬 간결하고 정확하게 정보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우선 그 주제에 있어서는 내가 기획담당보다 전문가이고, 대기업 본사에서 장표 만드는 일로 십여 년을 보낸 내가, 매우 바쁜 보스에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보고하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정보를 구성한 장표였다.


반면 기획담당은 내 장표를 제대로 보고 설명을 듣지 않고, 그 주제에 대해 그가 경험해 본 방식 혹은 그가 익숙한 방식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려고만 한 것이다. 물론 기획담당은 그가 화이트보드에 적고 내가 불러준 숫자로 채워진 내용에서 정보를 습득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는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3. 과거의 나


나는 대기업에서 인사업무를 십여 년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잠시 중국회사에 파견되어 중국에서 중국인 보스를 모시고 근무하고 있다.


나의 직장생활 중 절반이상은 보고서를 만들고 보고하는 일이었다. 내가 모셨던 상사들은 모두들 보고서에 엄격하게 민감한 분들이었다. 대한민국 대기업, 그것도 Staff부서, 그리고 본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보고서에 극도로 예민하다. 보고서를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일은 정말이지 나도 누구 못지않게 많이 해봤다.


예전에 상사 중 한 분은 업무를 지시하면 24시간 내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하였었다. 그래서 야근을 하여, 아침에 보고서를 제출하면, ”책상에 두고 가.“라고 한 후에 하루 종일 피드백이 없다가, 퇴근 시간에 본인이 나가면서, 내 보고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다음의 말과 함께. “수정할 내용 적어놨으니까, 다시 작성해서 아침에 보자.” 그러면 나는 야근을 하며, 빨간펜으로 밑줄과 끄적임들이 가득한 보고서를 수정하였다. 문제는 그다음 날 아침에 보고서를 제출하고도 퇴근시간에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고, 며칠간 이어진 것… 정말이지 이때는 퇴사를 해야 하나 싶었었다. 그분의 직속상사는 사장님이었으니, 최대한 완벽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싶은 건 이해한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첨삭해 준 내용을 그대로 다 고쳐주어도, 그것을 며칠간 고치게 한 것은 정말이지 너무했다.


“보고서는 우리의 작품이다. 도자기 만드는 장인의 작품은 도자기이고, 장인이 마음에 안 드는 도자기는 다 깨버리듯이, 우리는 완벽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보고서가 업무의 결과이고, 우리는 보고서로 승부해야 돼”


“어떤 보고서가 잘 만들어진 보고서인지 알아? Top, 바로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되는 보고서야. 그분들이 하루에 얼미나 많은 보고서를 보고받겠어? 최대한 짧은 시간에 정확한 정보를 주도록 예술작품을 만들어 봐.“


덕분에 그분의 추천 도서 <대통령의 글쓰기>를 읽으며, 과도한 트레이닝으로 나의 보고서는 나름의 framework를 가지게 되었고, 나는 보고서 작성 specialist가 되었다. 보고문화에 대한 가득한 회의감을 가진 채로…


4. 현재의 나


나는 현재 보고서를 직접 만드는 일이 별로 없다. 보고하는 일보다 보고를 받는 일이 더 많고, 간혹 보스에게 보고해야 일들이 있더라도 밑에 직원이 만든 보고서를 가지고 수정해서 보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밑의 중국직원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 받는 나의 모습은 리동의 모습보다는 기획담당을 그리고 나에게 퇴근길에 빨간펜 보고서를 건네주던 옛 상사를 더 닮아 있는 것이다.


주니어 시절에 결심한 대로, 나는 내가 윗사람에게 보고할 내용을 부하직원에게 작성하라고 할 때, 초안을 대부분 그려준다. 전체 스토리라인부터, 몇 장으로 하고, 각 장에는 어떤 내용을 어떠한 구성으로 작성할지를 draft로 적어서 건네준다.


그러나 중국인 직원이 꽤 긴 시간 끝에 가지고 온 보고서는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려준 구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작성된 내용의 보고를 들으며, 나는 자꾸 그의 보고를 중간에 끊게 된다. 그리고 보고서의 수정에 수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하다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안 되겠다 싶으면, 내가 파일을 건네받아서 직접 다시 작성한다.


5. 리동 vs 기획담당/나


물론, 기획담당과 나는 피보고자 이면서 동시에 보고자이다. 당연히 내 방식으로 소화되어야만 나도 상사에게 보고가 가능하다. 반면에 리동은 정보의 최종 소비자로 본인이 이해하고 판단, 결정하면 끝이다. 누군가에게 다시 그 내용을 보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보고서의 지속 수정을 요청하는 기획담당, 그리고 나와 리동의 결정적 차이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리동은 더 많은 보고를 수시로 받는다. 나와 기획담당보다 훨씬 더 다양한 주제의 내용에 대해서, 더 많은 양의 보고를 받는다. 그렇다면,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장 본인이 편안한 방식으로 보고 받고 싶을 것이다.


가령, “누구의 보고서를 보고 배워라.” 이렇게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보고 받은 많은 보고서 중 본인이 받아들이기 가징 쉬운 frame의 보고서를 공유하고, 유사한 flow로 작성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 CEO가 바뀔 때마다 보고서의 양식이 바뀌었다. 심지어 그룹사에서 보고서 양식을 지정한 적도 있다. 이유인 즉, 자매사에서 그룹 회장님께 보고한 보고서의 양식에 대해 회장님께서 매우 마음에 드셨다고… 그래서 보고서 구성, 폰트(글씨체, 크기), 각주의 색, 페이지 매기는 법 등을 양식으로 만들어서 그룹의 각 회사에 전파된 것이다.


그룹의 회장님은 보고의 최종 소비자로서 다시 누군가에게 보고할 일은 없다. 그러나, 수많은 정보를 보고 받을 때 같은 framework를 통해 정보를 수용함으로써, 보다 쉽게 정보를 받이들일 수 있다. 따라사 회사에서 공통의 보고서를 공통의 양식으로 통일하는 일은 보고서 작성자나 소비자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긴 하다.


리동과 나, 그리고 기획담당의 또 다른 차이는 정보수용의 유연성에 있다. 대기업에서 정해진 양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또 보고를 받는 습성에 젖은 나는 보고서의 양식에 극도로 엄격하고 예민해졌다. 보고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기에 앞서, 그 구성을 먼저 살핀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보고서 수정 놀이를 반복한다. 더 나은 보고서를 만드는 습성이 몸 안에 남아있는 것이다.






과도한 보고서 문화의 비판자였음에도, 보고서 수정을 지속 요청하고 있는 나를 위해, 또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제안한다.


보고 받을 때 다음의 질문을 해보자.


1) 우선, “나는 피보고자의 보고를 그대로 충분히 소화하였나? 나의 교만이 상대방을 낮게 여겨서 찍어 누른 것은 아닌가?”


나는 한국 보고문화의 피해자 이면서 전수자가 되어 중국인에게 보고문화를 전수하고 있다.


2) 다음으로, “이 보고의 최종 소비자는 나인가?” 만일 내가 최종 소비자라면,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가 일정 수준으로 이해하였다면, 사실 보고서의 재구성은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보고서를 고쳐 쓰고 있다면, 그 행동을 멈추도록 해보자. 물론 부하직원 육성을 위해 보고서 수정을 지시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정말 부하직원이 보고서 쓰는 스킬을 높이도록 하기 위함인가? 나의 정보 수용력이 낮아진 것은 아닌가?

3) 내가 중간보고자이고, 부하직원이 만든 보고서로 상사에게 다시 보고해야 하는 경우, “부하직원의 구성 그대로 보고하면 안 되는가? 필요시 마이너 수정만 해서 보고하면 안 되는가?“


보고자의 입장에서 볼 때 보고란, 더 많은 정보를 가진 본인이 중요한 정보를 추출하고, 효율적으로 재구성하여, 정보를 덜 가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행위이다. 보고서의 특정 영역에 있어서는 부하직원이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는 반대로, 지속적인 보고서 수정에 지친 과거의 나와 같은 분들에게, 스스로 다음의 질문을 해볼 것을 제안한다.


1) “상사의 의도가 뭘까? 나에게 왜 이런 보고를 받고 싶어 할까? 보고를 통해 무엇을 알고 싶고, 알아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많은 경우, 상사의 보고 지시에 목적이 결여되어 전달된다. 전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황정보를 통해 보고서의 목적, 혹은 용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2) ”나에게 공개가 안된 연관된 다른 정보는 무엇일까?“


피보고자(상사)에게는 보고자(부하)에게 공유되지 않은 더 많은 정보가 있다. 바빠서 공유하지 못한 정보 일수도 있고, 부하직원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정보일 수도 있으며, 민감한 정보라서 보안을 위해 공유하지 않은 정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보의 차이는 무엇보다 보는 시각이 달라서 발생한다. 이에 관해서는 기존에 작성했던 “Point of view”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https://brunch.co.kr/@paphorist/82




싱하간 보고는 미시와 거시의 조율(충돌)이다. 깊이와 넓이의 충돌(조율)이다. 상사에게는 넓은 거시의 시각이 있고, 보고자인 부하에게는 깊은 미시의 정보들이 있다.


따라서 더 세부적인 정보를 가진 보고자는 대개 할 말이 많다. 다만 더 넓은 다른 정보를 가진 피보고자가 듣고 싶은 방식과 내용은 보고자의 그것과 다른 것일 때가 많다. 주파수가 맞춰지지 않기에 지속적인 조율에서 소모적인 보고서 수정작업이 발생한다.


그래서 상하 간 소통인 보고는 참 어렵다.


결론적으로,


피보고자(상사)는 보고자(부하)를 전문가로서 인정하고,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지식을 습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리동은 참 잘한다. 그래서 빨리 배우나 보다)


그리고 보고자(부하)는 피보고자의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고는 문서 외에 구두로도 이루어진다. 구두 보고에도 frame이 있다. 구두보고는 보고서가 없기에, 조율되지 않더라도 보고서 수정작업은 필요치 않다. 다만, 조율되지 않은 구두보고는 서로를 멀 게 만들 것이다. 구두보고에 대하여는 이전에 작성한 아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s://brunch.co.kr/@paphorist/9


리동, 기획담당, 그리고 나의 모습을 보며, 보고문화에 대해 이상과 같이 간략히 생각을 정리해 본다.


기존 브런치북[즐거운 직장인]에 추가하고 싶으나, 이미 발간한 브런치북에는 추가가 되지 않는다. 이 글에 공감하신 분은 아래 브런치북도 추천드린다.

https://brunch.co.kr/brunchbook/paphorist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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