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vs 실존
의미를 너무 자주 찾으면 안 된다.
근본적인 의미를 찾다 보면,
멜랑꼴리 하고 시니컬하게 되며,
우울해져 버리거나 허무해져 버린다.
바람과 같이 스쳐 지나가는 인생
낙화와 같이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인생
그것이 인생이다.
낙화
떨어지기 위해 너는 피었구나.
가장 찬란한 꽃잎을 자랑하며,
너는 결국 바람에 흩날리는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너는 피었으나,
찰나와 같이 스쳐 지나가는구나!
허망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너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또 새싹을 피어내려 준비하는구나!
낙화,
나에게 너의 의미는 ‘봄날의 도래’이며,
나에게 너의 의미는 ’화려한 죽음‘이다.
Who am I
Where am I
What am I doing
존재의 의미,
삶의 의미, 죽음의 의미를 찾다 보면,
너무 무거워져서 땅속 깊이 파묻힌다.
지나치게 철학적, 종교적이 되어 버린다.
근본적인 의미를 찾는 무거운 질문들 앞에서
나의 하루, 나의 일상은 너무나 가볍고
나는 속 빈 비눗방울과 같이 둥둥 뜨며,
무가치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의미보다는 실존이다.
의미는 베짱이다. 실존은 개미다.
실존을 위해 분투하는 개미에게
베짱이의 거드름은 사치이다.
물론 철학과 종교는 필요하다.
아니,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면서,
죽음 후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죽음을 향해 매일 가까이 나가면서,
답을 알고자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 같다.
그렇게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회피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미라는 명사에 자주 쓰는 동사는
‘부여하다’이다.
그렇다. 의미는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 부여의 주체는 내가 될 수도,
타인이 될 수도 있다.
타인이 부여하는 나의 삶의 의미는
out of control 이지만,
내가 부여하는 나의 삶의 의미는
내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기억 속에,
나란 존재의 집을 짓고 싶어 한다.
타인의 의식 속에서,
나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나의 흔적을 남기고,
잊혀지지 않는 좋은 기억으로,
타인의 의식 속에 남겨지고 싶어 한다.
의미는 기억 속에 남겨지는 것,
타인들의 기억 속에
‘나의 존재의 집’을 짓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SNS를 통하여
기록을 남기려고,
기억을 남기려고,
무난히도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의미는 사후적인 판단이 될 때가 많다.
마치 반 고흐의 그림처럼,
사후에 타인에 의해 그 가치가 인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론, 자기실현적 예언처럼,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살다 보면,
타인들도 그 의미를 인정하게 될 수도 있다.
전혀 모르던 타인이,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는 순간,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전혀 낯설었던 일도,
내가 좋아하게 되는 순간,
좋아하는 일, 천직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싫어하는 순간,
죽지 못해 하는 일, 족쇄가 될 수도 있다.
기왕이면,
그 일을 하는 동안에
좋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스스로 일에 의미를(가치를) 부여하고,
보람을 느껴도 좋지 않겠는가?
내가 원해서 하는 일,
주인의식을 가지고 하는 일은
가치 있게 느껴질 경우가 많고,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은
나를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직장인으로서 삶의 의미를
돈 벌고, 자고, 돈 버는 것으로
‘무의미’하게 치부할 수도 있고,
주부로서 삶의 의미를
아이들 뒤치닥 거리나 하는 것으로
‘무의미’하게 치부할 수도 있다.
반면에 직장인으로서
직업적 소명을 느끼며 살 수도 있고,
주부로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보람을 느끼거나
다른 좋아하는 일을 찾아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오늘(현재)의 의미, 인생의 의미.
“사람은 앞을 바라보며 살게 마련이지만,
뒤를 돌아보며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 죄렌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오늘의 의미를 오늘 알기는 어렵다.
그리고 바쁜 일상에서,
뒤돌아보며 의미만 찾고 있을 수는 없다.
너무 바쁘고 삶의 굴레에 쫓기느라
‘의미는 개나 주라고 그래!’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가끔씩은,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나는 의미론자이며, 실존주의자이다.
나는 의미론자도 아니며, 실존주의자도 아니다.
때로는 둘 다이며, 때로는 둘 다 아니다.
구약성경 전도서의 구절처럼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무거울 때와 가벼울 때가 있고,
멈추어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의미를 찾아야 할 때가 있고,
의미를 잊어야 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