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나의 잽 10화

#10.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된 날

by 파라미터

곧 병원 진료 예정일이 다가온다. 아직 암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이 아니기에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 검사와 진료 날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괜히 마음이 불안해진다. 수술했던 자리가 아프고, 속 여기저기에서 뭔가 이상 징후가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러면 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된 것은 아닐까, 심장이 더 안 좋아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든다. 거기에 피곤하니 간이 안 좋은가, 소화가 잘 안 되는데 위가 문제인가 등.


암 이전에는 몸에서 보내는 통증 신호를 대체로 무시했다. 사는데 지장이 없었기에 웬만한 통증들은 참고 견뎠다. 하지만 수술 이후에는 작은 신호에도 괜히 예민해진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지만, 불에 데고 나면 불의 무서움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병’은 삶의 질을 저하시킨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까 다시 그런 우울한 상황이 될까 봐 솔직히 걱정된다. 그리고 병원은 ‘방문’ 자체 만으로도 사람의 기운을 빼서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그러니 3개의 진료과에서 검사하고 진료를 받는 나로서는 가능한 병원 가는 횟수를 줄이고 싶은 마음뿐이다.


복싱을 시작하면서도 건강이 나아질 것이란 기대는 반반이었다. 어떤 운동을 하더라도 대충 해서는 하나마나하다는 것을 과거에도 경험했던 바였다. 그래서 복싱을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하고(우선 관두지 않는데 목표를 뒀다는 것이 맞겠다), 몸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마음은 여유롭게 갖자, 다짐했다. 몸은 늘어지고 마음만 분주해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름 노력하며 지냈다.


반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3개의 진료과를 순차적으로 방문해야 했다. 여전히 걱정부터 앞섰다. 운동이 무리가 되지는 않았을까부터, 스스로 이상징후를 예민하게 살폈다. 심각하게 불안을 떠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사를 만나기 전까지 완전하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우선 신장암 수술을 받은 비뇨기과부터. 내게 운동을 가장 권했던 분은 신장암 주치의였다. 암 수술 후, 입원해 있는 동안 자주 떨어지는 심박수를 걱정한 주치의는 반드시 심장을 강화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었다. 세심한 배려였다.


그런 주치의 앞에 덤덤한 표정으로 앉았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주치의는 모니터에 뜬 영상사진과 결과지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떼어낸 부위도 깔끔하고, 폐도 깨끗… 전이된 곳이 없이…” 늘 간결하고 명쾌한 설명이었다. 나도 몇 번 고개만 끄덕이고는 재빠르게 진료실은 빠져나왔다. 다른 진료에서는 궁금한 것들이 생기는데 유독 이 진료에서는 머리가 멍해졌다. 진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정신을 차려서야, 질문거리가 없는 게 좋은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거렸다.


다음은 심장내과다. 전에는 약 효과도 거의 없어서 시술을 권했었다. 의사 쌤은 검사 결과를 보고 특유의 툭- 던지는 어투로 “많이 좋아졌는데요?”라고 말했다. 나도 결과에 놀랐고(전 검사대비 4분의 1 수준으로 부정맥 수치가 떨어졌으니) 괜히 뿌듯해졌다. 혹시 이것이 복싱의 효과인가?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저 열심히 운동하면서 관리하고 있어요'라고 밝히고 의사 쌤에게 칭찬받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 들었다. 내 건강을 스스로 돌보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그걸 또 굳이……. 그냥 좋아진 것이 너무 좋아서 그랬다. 그래서 의사 쌤에게 "저 복싱하고 있는데, 괜찮겠죠?"라고 은근히 물었더니, 듣던 의사 쌤이 또 그 툭- 던지는 어투로 반응했다. “프로 할 건 아니잖아요?”

무리하지 말라는 뜻을 내포한 농담을 그리 무표정하고 시니컬하게 던지다니, 그 어색한 진심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의사 쌤은 “꾸준히 하세요. 다음 예약은 1년 뒤에 잡죠.”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믿기지 않았다. 매번 진료를 볼 때마다 시술 날짜를 잡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었는데 말이다. 나오기 전에 의사 쌤에게 운동할 때 가끔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은 괜찮은지 물었다. 의사 쌤은 “그럴 수 있다”라며 통증이 심하다 싶을 때 대처 방법을 알려줬다. 물론 최선은 병원이겠지만.


복싱하면서 내 심장이 안 좋다는 것을 가장 먼저 느꼈다. 복싱 초반에 가슴이 약간씩 쪼이는 통증이 느껴지곤 했다. 그때마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고 무리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이전에는 그런 통증 없이 그저 정신이 아득해지기만 했었는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통증을 느끼게 되자, 나의 활동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에서도 운동, 특히 내가 꾸준히 할 수 있는 복싱을 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간 내과. 수술 전후로 간 수치가 너무 안 좋았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의사 쌤은 정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환자 중에 이렇게 건강한 사람 없어요!

"각종 수치도 모두 정상에, HDL(좋은 콜레스테롤) 수치도 너무 좋고. 혹시 운동하세요?"

이번에는 의사 쌤이 먼저 질문했다. 차분히 끄덕이는 내게 의사 쌤은 어떤 운동인지 물었다.

복싱요.

와, 복싱요? 꾸준히 하세요.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진심으로 좋아해 주시는 의사 쌤 덕분에 괜히 나도 단순하게 기분이 업!! 의사 쌤이 도와줄 것은 없지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혹시 맥주 한 잔 정도 마셔도 될까요?

“그럼요, 한 잔 괜찮아요. 많이 마실 건 아니죠?


모든 진료과에서 별 이상이 없거나 호전됐다는 얘기를 듣고 나면 미세한 통증은 사라진다. 그냥 걱정이 만든 심리적인 통증이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전에 <브레이킹 배드>를 열렬히 시청하면서 상상해 본 것이 있다. 만약 내가 <브레이킹 배드>에서 폐암 진단을 받은 월터 화이트처럼 암에 걸린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평범했던 교사에서 마약 제조와 판매까지 가담하게 되는 월터의 예상치 못한 삶의 변화가 인상 깊었다.) 나는 월터처럼 대변화는 아니더라도 나의 모든 루틴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암을 겪고 나니, 나의 실상은 상상과 달랐다. 꾸준히 복싱하고, 전보다 일찍 잠을 자고, 커피를 줄이고, 글을 쓰면서 연속 좌절하던 마음을 조금(말 그대로 조금) 내려놓게 되면서 전보다 더 규칙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건강해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고, 그래야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되서일까. 그것이 현재 내가 복싱을 즐겁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병원에서 좋은 결과를 듣고 나면 뿌듯해서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건강해졌다는 말을 들을수록 복싱은 패싱 할 수 없게 됐다. 그런 날은 괜히 더 잘하고 싶다는 의욕만 충만해진다. 성급한 욕심이다. 관장님이 이런 나의 마음을 빠르게 간파하며 충고했다.

욕심내기 시작하는 순간 탈 납니다.


욕심내다가 아프게 되어 운동을 쉬는 것보다, 안 아프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충고를 깊이 새기며 무리하지 않고 운동을 마무리한 후, 내가 나에게 내린 작은 보상은 시원한 맥주 딱! 한 잔이었다. 가장 다디단 맥주에 잠깐이라도 소소한 행복이 시원한 맥주 거품처럼 넘쳐났다.


keyword
이전 09화#09. 어깨의 힘, 내려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