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급히 해결해야 할 일 몇 개를 처리하다 보니 10시가 훌쩍 지났다. 점심 약속이 있는데 운동을 하러 갈까 말까 순간 고민한다.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급히 운동 가방을 챙겨서 체육관으로 달려간다.
“관장님, 저 오늘 12시에는 나가야 하거든요.”
“왜요?”
“점심 약속 있어서요. 운동하고 밥 먹으러 가려고 달려왔어요.”
“굿! 입맛이 더 좋아질 겁니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지만, 줄넘기는 필수로 하고 간단히 몸을 푼다. 관장님도 미트를 재빨리 잡아준다. 마음은 급해도 미트 연습은 정석대로 차근차근. 미트 연습을 하면 나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부족함이 보이는데도 그냥 가는 건 복싱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단, 1라운드 만이라도 연습하고 가야지 싶어서 샌드백 앞에 선다. 부지런히 손과 발, 온몸을 움직이며 땀을 뚝뚝 흘린다.
앗! 12시가 넘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이미 한 번 시간을 조정한 터라, 약속 시간을 늦출 수 없다. 늦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서두른다. 시간은 촉박한데, 복싱화 끈은 왜 이리 풀기가 번거로운지. 나름 속도를 내서 복싱화를 갈아 신고 인사하며 나가는데 휘청! “헉!”은 내가 아니라 인사를 받아주던 회원들과 관장님의 외침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난 금세 균형을 잡고 헤- 하고 웃는 여유도 보인다. 그동안 하체에 힘을 주고 중심을 잡던 자세를 부지런히 연습하지 않았던가!
점심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간다. 이건 뭐, 입맛이 좋아지기 전에 너무 지쳐서 먹을 힘도 없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원래 생각했던 대로 짧게 연습만 했더라면, 헐레벌떡 달려갈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렇게 시간 계획에 차질이 생긴 이유는 집중 이후 찾아온 ‘몰입’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복싱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복싱은 처음이라 어색한 자세가 이상해서 부끄러웠고, 부끄러울수록 타인의 눈치를 자꾸 살폈다. “아무도 신경 안 씁니다.”라고 관장님이 얘기했지만……. 체육관 거울 속에 어설픈 나와 폼 좀 잡는 한 사람이 동시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의 어색한 동작을 보며 씩- 웃고 있던 그 사람과(어설픈 초보자의 자격지심에 그저 나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다. 웃음이 삐져나왔을 만큼 내가 웃겼을까? 아마도).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쳤다는 것은 나도 신경과 시선을 딴 데 두고 있었다는 것. 나에게, 자세에, 동작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나의 복싱이 불안정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노력해야 했다. 노력해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그것 중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것이 ‘집중’이었다.
집중했다. 의식적으로 나에게, 자세에, 샌드백에, 사각링 안에… 그렇게 집중하다 보면 그렇게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어지고, 운동하는 내내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게 된다.
복싱 타임 벨이 중간중간 휴식을 알려주기는 했지만, 다시 집중하면 내가 몇 라운드째 연습하고 있는지도 잊은 채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몰입(Flow)하고 있었다.
몰입의 즐거움!
무엇보다 기분이 좋을 때는, 몰입에서 빠져나왔을 때다. 뚝뚝 떨어지던 땀이 서서히 식으면서 몸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뿌듯한 희열을 느낀다. 한 모금의 시원한 물은 그리 다디달 수가 없다. 잡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게 머리는 텅 비고, 개운해진 컨디션에 배고픔 따위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몰입의 즐거움을 느낄 기회가 적어진다. 무엇보다 몰입 자체가 힘들어지는 것 같다. 잡념이 나를 지배하는 시간은 많아지고, 조급함과 불안함으로 의식적으로 집중하는 시간부터 짧아진다. 씁쓸하고 서글프다. 그런 감정이 짙어질 때, 복싱은 내게 집중의 시간과 몰입의 즐거움을 다시 일깨워 줬으니……
나, 복싱 좋아하네?
물론, 몰입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다시 잡념이 뇌를 잡아먹고, 지나치게 의식적인 집중은 나를 피곤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아도 빠져들게 되는 몰입의 즐거움을 깨달은 이상 반복하면 된다.
복싱할 때처럼, 3분, 3분… 의식적으로 집중하고 그것이 진심 즐겁다면 몰입의 시간은 저절로 찾아온다. 이렇게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샌드백 앞에서 집중하며 부족함을 연습한다. 타임 벨이 울리면 저절로 샌드백을 껴안게 될 정도로 힘은 들지만 30초의 휴식이 끝나면 다시 또 시작할 수 있다.
관장님이 쓱 묻는다.
“복싱 좀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에이, 다 아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