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뱃속, 엄마는 세상 속
몹시 내성적이지만 상당히 외향적이다. 말주변이 없으면서도 사람은 좋아해서 직장 회식이나 직원 여행조차도 싫다고 여겨본 적이 없다. 소개팅할 때마다 맛있는 거 먹으면서 새로운 사람 만나서 얘기 듣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대단한 ‘바깥순이(집순이의 반대)’이기도 해서 학교 행사로 가는 소풍이나 수학여행마저 은근히 기다린다. 멀리 출장이라도 가면 그 동네 구경하느라 어찌나 신나던지. 혼자 있는 날은 산책이라도 나가서 바깥에서 기운을 얻어와야 한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는 침울함을 누른 채(반년 넘게 집에 가지 못한 집순이의 심정을 생각해 보시라) 많은 시간을 소파에 누워 지냈다. 흥이 오르면 나도 모르게 무리해 버리는 타입이라 놀러 다니다가 몸을 혹사할까 겁났다. 날뛰고 싶은 마음보다 아기의 안전이 더 중요하지. 누르고 누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딱 두 번, 집을 떠나 낯선 지역에서 잤다.
첫 번째는 임신 5주 차 여수 여행이었다. 산부인과에서 임신을 확인하기 전에 미리 계획했던 2박 3일의 여행이었다. 아직 임산부 생활 수칙을 잘 모르지만 차를 오래 타는 게 좋을 리는 없을 텐데. 궁리 끝에 조수석 시트를 최대한 뒤로 젖혀서 거의 누워서 여수까지 갔다(오래 타는 것과 누워서 가는 게 무슨 상관인지 지금에 와서는 잘 모르겠다).
숙소는 여수엑스포역 부근이었다. 차를 더 타는 대신 숙소 근처만 슬렁슬렁 걸어 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합의를 보고, 우선 요트를 탔다(자동차는 안 좋다면서 어째서 요트 진동은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구명조끼를 입은 채 요트를 탔고, 몹시 신났다. 신난 김에 숙소 야외 수영장 옆에 있던 ‘천국의 계단’에도 용감하게 척척 올라가서 사진을 잔뜩 찍었다. 점심 먹을 때도 맛만 보겠다며 육회(안 익힌 건 임산부 금기 음식)를 두어 점 먹었다. 회를 못 먹으니 무한 리필 게장(안 익힌 건 마찬가지) 식당에 가서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을 엄청 먹고, 줄을 길게 서 있기에 뭔가 싶어 줄을 섰다가 찹쌀떡(팥도 금기 음식)도 한 박스를 사다 먹었다. 성에는 안 찼으나 평지든 계단이든 어지간히도 걸었다.
다시 조수석에 누운 채로 부산까지 와서 며칠 후에 아기 심장 소리를 들었다. 뭣도 모르는 엄마의 각종 뻘짓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잘 살아남아 주었다.
두 번째는 창원 여행, 임신 31주 차. 여행이라기보다는 즉흥적으로 하룻밤 숙소를 잡게 된 것에 가까웠지만. 이제 아기 없는 여행은 다시 없을 거라 여기던 때라 그마저도 감개무량했다. 커다란 복합쇼핑몰 안을 슬슬 걷다가 채소 가득한 점심을 먹고, 같은 건물 43층의 카페에서 자몽차를 마셨다. 맵지 않게 저녁을 먹은 후 용지호수를 천천히 걷고 일찍 쉬었다. 이튿날 호텔 조식을 먹고 나서 다시 한참을 잤다. 호숫가와 가로수길을 잠깐 걷고는 태아를 키운단 핑계로 추로스에 초콜릿까지 찍어 먹으며 혈관에 당분을 밀어 넣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또 세상모르고 쿨쿨. 두세 시간쯤 가뿐하게 걷던 박유진, 어디 갔니.
이렇게 변해간다. ‘노는 게 제일 좋’던 내가 눈 뜨자마자 태동부터 체크하는 삶으로, 집밖에 덜 나가고 음식을 가리고 계단을 피하고 한 번에 오래 걷지 않는 삶으로. 점점 무거워지는 배만큼 꼬박꼬박 책임감을 채워가며, 그렇게 엄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