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키뉴 Dec 26. 2020

타버린 쿠바 샌드위치

타버린 것을 타버리지 않았다 하니 더 따분해지는

『아메리칸 셰프(Cheff)』에는 쿠바 샌드위치가 나온다. 칼 캐스퍼의 아들 퍼시는 푸드트럭 일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나눠준다. 이미 타버린 것이라도 말이다. 쏘 왓(So What)? 퍼시는 돈도 내지 않은 이에게 타버린 샌드위치를 주는 게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출처: 유튜브 채널 '영화를좋아하는사람,' https://www.youtube.com/watch?v=S7TN7k-HYHo&t=183s


아버지 칼은 트럭에서 내려 아들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너는 이 일이 따분하니?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라떼'만 해도 군대에서는 '후송으로 짼다'는 말이 있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군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말로 아팠지만 그래서 지금도 아프지만, 나 역시 후송으로 짼다는 오명을 가진 적이 있다. 군병원에 입원하면 정말 째게 되더라. 누워 책을 읽는다든가, 피엑스에 간다든가, 벚꽃과 봄 내음을 만끽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성가신 일이 하나 있었다. 회복실 환자에게 밥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군병원 소속 병사가 당번을 정해주면 그 당번은 회복실에 식사를 날라야 했다. 차례가 온 어느 날, 회복실에서 준 메모에는, 이 환자에게는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하는 것들이 적혀 있었다. 메모대로 식판을 채워나갔다. 들고 있던 식판에는 흰죽만 자리하고 있었다. 쓰인 대로 했으니 괜찮겠지.


따분해서일까? 돌이켜 보면 “태워버린” 일들이 많다. 초안더러 별로라 하길래 형식만 바꾸어 다시 보여줬다. 빈약하다 하길래 본문에 있던 말을 표로 만들고 그림을 넣었다. 서너 번이나 다시 해 오라 하길래 처음 것으로 다시 가져갔다. 구체적일수록 구체적으로, 분명할수록 분명하게 까인다는 선배의 말에, 구체적으로도 분명하게도 쓰지 않았다. 때로는 1 더하기 1은 창문이라고도 했다. 아닌 걸 알면서도 말이다.


아닌 게 아니었나 싶다. 병사는 흰죽만 있던 식판을 보더니 내게 말했다.


환자가 회복하는 데 충분할 거예요.


타버린 샌드위치더러 잘 구워졌다 한다. 덜 익은 샌드위치 역시 잘 구워졌다 한다. 형식을 바꾸고 그다지 도움되지 않는 그림과 표를 넣었더니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다고 한다. 서너 번 수정 끝에 처음의 그것을 보여줬더니 우리가 진정 원하던 것이라 한다. 운문처럼 추상적인 것도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한다. 체계적이고 타당한 접근으로 1 더하기 1이라는 문제를 설정하였고 그 해답을 구하려 하였으며 마침내 그것이 창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한다.


퍼시는 아닌 게 아니지 않나 싶은 마음에 말해 본다. 그 샌드위치는 다 타버린 것이었다고. 이에 팀장은 반문한다. 쿠바 샌드위치 맛을 네가 알기나 하냐고. 그게 탔는지 타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있냐고.


퍼시와 나는 지금도 매우 따분한 상태다.

이전 07화 네가 같잖아서 죽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