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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Nov 06. 2024

연보랏빛

_ 슬픔

 

# 연보랏빛
 : 연한 보랏빛.



꿈의 날개가 꺾이던 날. 그날의 연보랏빛 슬픔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홀로 부딪혀가는 출간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어렵사리 이루어진 계약으로 그 길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는데 그 역시 초심자의 순진함이었던 거지요. 봄을 지나 여름과 가을, 그렇게 세 계절이 흐르는 동안의 달콤한 기다림은 한 통의 전화로 인해 지난밤 긴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잘 만들어 보겠다고 시작된 메시지는 한두 달 계속 미뤄지고 있다는 소식으로 바뀌었고, 연말을 목표로 하여 집중적 마케팅을 계획 중이라던 설레는 문자는 끝내 계약 파기라는 전화로 마무리되었던 거예요.


"출간을 희망하셨던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묻고 싶은 말을 겨우 목으로 넘기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거대한 둔기로 맞은 듯 온몸에 힘이 빠져서 어떻게 남은 수업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출판 시장이 어려우니까. 인지도 없는 신인 작가가 뚫고 가기에는 내 글이 부족하니까. 그 말을 전하는 출판사 측의 마음도 좋지 않았을 것임을 이해하면서도 한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늦은 밤 퇴근하려 길을 나서는데 그해의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유난히도 기다렸던 눈이 첫눈 답지 않게 어찌나 소담스럽게 내리던지 삶이 참 얄궂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그늘을 드리운 나의 꿈’. 내딛는 발자국 한 걸음마다 땅속 깊숙이 박히는 듯했습니다.


여기까지 일까. 그저 몽상가의 꿈이었을까. 이런저런 상념으로 함박눈 오는 거리를 걸었습니다. 집이 가까워질 때쯤이었어요. 웬일인지 저 멀리 빛나는 미소의 두 딸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마침 첫눈이 와서 아이들이 내가 올 시간에 맞춰 나왔던 거예요. 까르르 웃으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를 사 들고 장난스레 달려오던 아이들. 시리고 아픈 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고 보석 같은 딸들이 다시금 일깨워 주었습니다.     

 

버틸 수 없어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바닥일 수 없다고 여기다가 더 깊은 바닥이 있음을 알게 되는 시간들. 또 이리 힘들구나. 언제쯤이면 좀 나아질까 하는 생각. 괜찮아 지나갈 거야 하면서도 또다시 무기력해지는 순간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아 숨이 막히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끝내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생은 다시 나를 이끌어 가겠지요. 반짝이는 일상의 순간들이 그늘진 나를 일으켜 세울 테니까요. 여전히 수없이 많은 고배의 잔을 마시면서도... 나의 책이 그저 몇 년간 어느 서가에 자리하다 쓸쓸히 사라질지라도...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레이트 블루머, 늦게 피는 꽃을 꿈 꾸 며.

그저 몇 년간 어느 서가에 쓸쓸히 있다가 사

 그저 몇 년간 어느 서가에 쓸쓸히 있다가 사라질지라도어느 서가에 쓸쓸히 있다가 사라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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