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앞에서 우세요. 몸부림치세요.
'시편 13편' 속히 도와 달라는 기도
시편이 원래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시편을 읽고 있는 요즘 내 마음이 그런 걸까? 시편 1편부터 13편까지 읽어오는 내내 다윗의 정서는 피폐해져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에게 이렇다 할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신다.
땅 밑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자신과 하늘 보좌에서 자신을 지켜만 보시는 듯한 하나님 사이에서 다윗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매일같이 울며불며 몸부림치다가 끝내 제풀에 쓰러지고 만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드러내지만 그저 자기 암시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매일같이 이런 다윗의 상태를 보면서 묵상하자니 나도 힘들다. 정신과 의사 체험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그의 울부짖음을 그만 좀 들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데 왜 성경에서까지 절망을 경험해야 하는가.
오늘을 시작하는 내 상태가 지금 이런가 보다. 그저 사유의 흐름대로 손가락을 놀려보니 위와 같은 마음이 드러나 버렸다. 성경 속에서 엿보이는 다윗은 무척 고통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나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잘 와닿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기대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 다윗을 통해서 별다른 소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그 위대한 다윗도 하루하루 절망스러운 나날을 보냈었음을 알 뿐이다. 그저 반복되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알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라도 정신줄을 붙잡으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을 볼 뿐이다.
반복되고 있는 삶의 고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 번의 고민으로 한 번의 울부짖음으로 삶의 번민이 해결된다면, 그게 신앙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니다. 꽁꽁 얼려둔 고기를 꺼내 놓으면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듯 신앙에서의 삶은 그렇게 변한다.
"절망 앞에서 우세요. 몸부림치세요. 우는 사람은 죽지 않아요. 그렇게 견디세요. 신앙은 견디는 것이에요.".. 박영선 목사님 설교 말씀이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