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소중한 존재 - 아이가 보는 세상
3. 은하철도 999와 슈퍼문
아이가 다섯 살 즈음 살던 집은, 안 방과 거실 창문 밖으로 이따금 지하철이 지나가기도 하고 집 앞 주택가에 더부살이하는 고양이가 마당에 나와 울기도 했다. 낮은 주택가 골목과 그 너머 6차선 대로변에 지하철 역이 있었다. 우리 집은 4층이었고 거실 창 너머 정면으로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지상철이라 하루 종일 열차가 역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보름달이 크게 뜬 어느 밤, 아들이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지하철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 저기 지하철이 들어왔는데 슈-욱하고 사라져. 어디로 갔지?"
"어머나! 지하철이 사라졌어? 어디로 갔을까?"
빨래를 개다 말고 바깥을 보니 달이 지하철 역에 걸려 역을 한층 밝게 해 주었다.
"으-음, 지하철이 슈 욱하고 들어와서 반짝반짝하고 빛을 내며 사라져!"
깜깜한 밤이라 지하철 역 주변이 유독 빛이 났다. 낮에는 역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과 차도로 생생 달리는 차가 많아서 역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 플랫폼이 노란 불빛을 내며 어둠을 밝히면, 어느덧 지하철 역은 존재감을 내보인다. 어둠 속에서 기다란 전철이 빛을 향해 달려 역 안을 가득 채운 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한동안 역으로 들어와 부서지는 열차의 빛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엄마! 지하철이 어디로 가는지 알았어!"
"어머, 어디로 가는데?"
"지하철이 '슈-욱'하고 들어오면 빛이 '쏴아'하면 달이 밝아져! 그래서 달이 뚱뚱해져!"
나는 "오늘 달이 빛을 엄청 많이 먹었나 보다" 하고 받아쳤다.
"응, 내가 기차가 들어가는 걸 몇 번이나 봤어! 그래서 저 달은 뚱뚱하고 밝은 거야."
라며 흡족한 입술을 한 얼굴을 끄덕인다.
나는 아이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한동안 지하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빛을 내는 지하철을 보며 고작 생각해 낸 게 은하철도 999를 실제로 본다면 저런 느낌일까 정도였는데 아이는 다르구나 생각했다. 그가 만든 이야기엔 경계가 없다. 지금 만들어내는 상상의 세계는 그의 세계를 쌓아가는 한 축이 되리라. 그 믿음과 상상력이 현실세계와 사이좋게도, 혹은 나쁘게도 마주하겠지. 아이의 눈으로 보고 느낀 세계는 어떠할지 궁금하면서도,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오래도록 공존해주길 바랐다.
언젠가는 아이가 현실 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구분 짓게 될 거다. 어째서 자신이 상상한 일이 현실에서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면 나는 무엇으로 아들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자신이 구축한 세계가 깨어지는 경험을 하는 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었다.
초등학교 2 학년쯤이었다. 애정으로 돌보던 잡종견 '다롱이'가 낳은 새끼가 옆집 언니네 분양됐다가 일주일도 안돼서 얼어 죽었다. 언제까지나 옆에 있을 거 같던 할머니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영원하리라 믿은 세상이 무너지는걸 처음 느꼈다. 상실감과 함께 현실은 내 기대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무렵부터 떼쓰기를 그만두고 철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위로받을 곳이 없어 외로웠고 내면으로 세계를 단단히 하는데 공을 들였다.
그 세계의 벽을 깨느라 고생했던 질풍노도를 생각하면, 나는 아들에게 현실과 마주할 때 위로가 되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아들에게는 앞으로 언제가 될지, 어떤 일이 그의 세계를 깨뜨리는 트리거가 될지 궁금해졌다.
보름달이 유난히 크던 어느 날, 나는 아들이 잃게 될 '지금'을 안타까워했다. 지하철 역 하늘에 뜬 슈퍼문은 은하수를 건너갈 은하철도 999를 비추듯 한층 밝았다.